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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May 27. 2022

설탕이 필요해

#스트레스 #일 #회사 #여행

설탕이 필요한 날이 있다. 초콜릿을 와작 깨물고 입안 가득히 퍼지는 단맛에 취한다. 그런다고 빨갛게 달아오른 마음이 사르르 녹진 않는다. 무슨 긴급 처방이라도 있어야 하면, 노오란 커스터드가 잔뜩 든 크림빵을 아귀아귀 먹는다. 까만 아메리카노는 달달한 크림빵과 천생연분. 뻘꺽뻘꺽 들이켜면 한순간에 허기가 달아난다. 탄수화물을 먹었으니 힘이야 나겠지만, 이미 구멍 난 마음을 기울 재주가 나에겐 없다. 속은 차도 마음이 헛헛한 것이다.


이런 날에는 무작정 자동차 액셀레이터를 밟는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몸부터 움직인다. 머릿속으로 갈지 말지, 어딜 갈지 저울질만 하다간 벗어나지 못할  뻔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일단  보자는 마음으로 북쪽으로 핸들을 틀고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부를 묻는  생략했다.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 나랑 같이 놀러 가자.”


K 대학 동기인데 여태껏 혼자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자 없는 남자들 표본으로 추앙해도  정도다. 사실 나도  면에서는 딱히 내세울  없고, 오히려 같은 처지다. 우리가 사전 계획 없이 훌쩍 떠날  있는  결정적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어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 도시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여행은 나의 안온한 세계에 파문을 일으킨 곳을 떠나는 일로 정의할 수도 있겠지. 당장이라도 생경한 도시 어딘가에 던져지고 싶었다. 그곳에서 K와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 한 캔을 마시면 다시 살아갈 힘이 솟아날 것만 같았다. 나는 천안이든 수원이든 인천이든 간에 어디라도 좋았다. 가급적 빨리 닿을 것. 이것 말고 내가 내건 조건은 없었다.


K 달랐다. 그는 주말이면 홀로 백패킹을  만큼 초록을 사랑했다. 처음엔 여행지 결정을 전적으로 내게 맡기는 듯했지만 일백  고쳐먹어도 회색 도시는 싫다고 잘라 말했다. 도무지 여행을 가는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수원은  앞에 마실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이왕이면 산이나 바다로 가길 바랐다. 하기는 닷새간 해진  녀석의 마음을 품어줄 곳은 엄마의  같은 대지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유일한 문제는  말을 했을  내가 너무 멀리 가버렸다는 것이다. 출발지는 대전이고 잠정적인 목적지는 수원이었는데, K 옥신각신하다 평택을 지나고 있었다. 수원 턱밑까지  것이다. 금요일 저녁이었는데도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통행이 원활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길이  뚫렸다고 도로공사에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안성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시계를 보니  9시쯤이었다.


 차에는 없는 것과  되는  있다. 내비게이션이 없고 핸드폰 충전이  된다. 전화벨이 울렸다. K였다. 녀석이 말하려고 하는데 내가 말을 도중에 끊었다. “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어.” 5 안에 다섯 단어를 말하는 게임 참가자처럼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강릉 옥계 호텔까지 앞으로 253.3km  달려야 했다. 도착할 때까지 핸드폰 내비게이션이 켜져 있을지 장담할  없었다.


핸드폰 화면 밝기를 최대한 줄였다. 영동고속도로는 가로등이 있는 곳보다 없는 곳이 더 많았다. 새가 하늘에서 내 차를 봤으면 에스프레소 마키아토처럼 까만 바탕에 점을 찍은 것 같았을 것이다. 유일한 의지처는 핸드폰 내비게이션 음성이었다.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따라 원주, 평창, 강릉을 지났고 옥계 IC를 통과할 때 한시름을 놓았다. 그녀의 음성 속 냉정함이 묘하게 달아오른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전에서 바로 옥계로 간 것보다 50km를 더 달렸다. 40분이나 더 걸린 것이다.


왕복 2차선 지방도로를 서행하다 편의점이 보름달처럼 빛나고 있어 차를 세웠다. 익숙한 실루엣이 앞차에서 내렸다. K였다. 우리는 마주보고 반웃음을 지었다.

호텔은 어디야?”

내가 물었다.

저기, 이제  왔어.”

K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어렴풋이 호텔이 보였다. 해안 도로인지 파도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세상 모든 초콜릿과 크림빵보다  달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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