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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Jun 24. 2022

바보야, 문제는 균형이야

#여자 #연애 #후회 #균형

오래전 사귀었던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 변했어.” ‘사랑과 전쟁 나올 법한 진부한 대사에 나는 심드렁했다. 단지 투정으로만 여겼다. 나중에  애는 발언 수위를 높였다. 관계에 종말을 고할  있노라고 경고했다. 뒤돌아보면 분명 옐로카드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눈치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둔하다. 그땐 그녀가 레드카드를 만지작거린다는  전연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집에 바래다주는 길이었다. 아파트에 살았는데    호에 사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매번 아파트 단지 초입에서 헤어져서다. 대규모 단지였는데, 그녀는 아버지에게 들킬까  불안해했다. 아버지가 엄하다고 했다. 지지벌겋게 변할 부친의 낯빛을 마주할 정도로 나에 대한 온도가 높진 않았던 모양이다. 둘이 나란히 걷다가  애가 예고 없이 멈추는 바람에 발걸음이 어긋났다. 당시 우리 관계처럼. 비스듬히  채로 입을 뗐다. “오빠 그만하자.” 아파트 화단의 벚나무 꽃봉오리가  터질  부풀어 있을 무렵이었다. 아무 예고 없이 내린 소나기에 꽃망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시작하자고 운을 뗀 건 나였다. 처음 만난 날부터 나는 그 애가 퍽 마음에 들었다. 볼록한 콧방울과 시원한 입매가 예뻤다. 무엇보다 살짝 웃을 때 초승달과 상현달 어름의 눈매가 고왔다. 가진 것보다 없는 게 많았던 내가 마음을 표현할 길은 시간을 내어 주는 것뿐이었다. 한동안 그녀는 일 순위였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휴일에도 그녀와의 약속을 잡고 나서야 다른 일을 계획했다. 언젠가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만나기로 한 날이 아니었다. 그 애는 다른 약속으로 내가 사는 집 근처에 왔다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시간을 냈다. 시간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지극한 사랑 표현이었다.


 애를 만나기 전에 내가 시간을 쏟은 대상은 소설이었다.  무렵 김영하, 김훈,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은 출간된 책을 모조리  데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나머지 통근길에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게다가 팩트 위주로 기술해야 하는 글에도 문학적 표현을 가감 없이  터라 사무실에서는 문청으로 통했다. 글이 과히 이상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호칭이 듣기 좋았다. 한편으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워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소설에 시간을  할애했다. 부담이 능력으로 변하길 바라면서.


그녀에게 소홀해진  소설 탓이다.  애에게 빠질수록 서점에서 구입하고 읽지 않은 책들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더께만큼 쌓여갔다. 마치 밀린 방학 숙제처럼. 숙제를 쩨꺼덕 해치우려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스스로 소설에  부채 의식에서 벗어날 때쯤 그녀는 나에게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헤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깨달음은 시차를 두고 뒤떨어져 온다.


그해 벚꽃이 피고 지고 참매미 수컷이  몸통을 떨어서 암컷에게 구애할 때쯤 완전히 헤어졌다. 더이상   마음을 돌릴 말도 염치도 나에게 있지 않았다. 이별하고 무지하게 책이라도 읽었으면 연연하지 않았을 텐데, 슬픔은 연착하여 한동안 머물렀다.  후로 소설을 엄청 읽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으며 딱히 새로운 일에 빠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학창 시절 시험기간만 되면 도졌던 교과서 말고   읽고 싶은 병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결혼 준비를 하는 직원과 밥을 먹었다. 남편이 타지에서 근무한다고 하여 신혼집을 어디로 정했냐고 물었다. 신랑이 사는 지역에 아파트를 마련했는데, 자신은 이전처럼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 살 거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주말 부부였다. 결혼하는데 같이 살지 못해 아쉽겠다고, 말했더니 돌아온 답이 오히려 주중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단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외로워하면서도 혼자이고 싶어 하니까. 모순적이지만 그게 사람인 걸 어찌하랴. 중요한 건 둘이 균형을 잡는 것이다. 예비 부부는 적당한 지점을 찾은 듯했다. 오래전 나를 떠난 그녀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바보야, 문제는 균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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