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연애 #후회 #균형
오래전 사귀었던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 변했어.” ‘사랑과 전쟁’에 나올 법한 진부한 대사에 나는 심드렁했다. 단지 투정으로만 여겼다. 나중에 그 애는 발언 수위를 높였다. 관계에 종말을 고할 수 있노라고 경고했다. 뒤돌아보면 분명 옐로카드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눈치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둔하다. 그땐 그녀가 레드카드를 만지작거린다는 걸 전연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그 애 집에 바래다주는 길이었다. 아파트에 살았는데 몇 동 몇 호에 사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매번 아파트 단지 초입에서 헤어져서다. 대규모 단지였는데, 그녀는 아버지에게 들킬까 봐 불안해했다. 아버지가 엄하다고 했다. 지지벌겋게 변할 부친의 낯빛을 마주할 정도로 나에 대한 온도가 높진 않았던 모양이다. 둘이 나란히 걷다가 그 애가 예고 없이 멈추는 바람에 발걸음이 어긋났다. 당시 우리 관계처럼. 비스듬히 선 채로 입을 뗐다. “오빠 그만하자.” 아파트 화단의 벚나무 꽃봉오리가 막 터질 듯 부풀어 있을 무렵이었다. 아무 예고 없이 내린 소나기에 꽃망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시작하자고 운을 뗀 건 나였다. 처음 만난 날부터 나는 그 애가 퍽 마음에 들었다. 볼록한 콧방울과 시원한 입매가 예뻤다. 무엇보다 살짝 웃을 때 초승달과 상현달 어름의 눈매가 고왔다. 가진 것보다 없는 게 많았던 내가 마음을 표현할 길은 시간을 내어 주는 것뿐이었다. 한동안 그녀는 일 순위였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휴일에도 그녀와의 약속을 잡고 나서야 다른 일을 계획했다. 언젠가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만나기로 한 날이 아니었다. 그 애는 다른 약속으로 내가 사는 집 근처에 왔다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시간을 냈다. 시간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지극한 사랑 표현이었다.
그 애를 만나기 전에 내가 시간을 쏟은 대상은 소설이었다. 그 무렵 김영하, 김훈,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은 출간된 책을 모조리 산 데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나머지 통근길에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게다가 팩트 위주로 기술해야 하는 글에도 문학적 표현을 가감 없이 쓴 터라 사무실에서는 문청으로 통했다. 글이 과히 이상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 호칭이 듣기 좋았다. 한편으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워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소설에 시간을 더 할애했다. 부담이 능력으로 변하길 바라면서.
그녀에게 소홀해진 건 소설 탓이다. 그 애에게 빠질수록 서점에서 구입하고 읽지 않은 책들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더께만큼 쌓여갔다. 마치 밀린 방학 숙제처럼. 숙제를 쩨꺼덕 해치우려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스스로 소설에 진 부채 의식에서 벗어날 때쯤 그녀는 나에게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 헤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늘 깨달음은 시차를 두고 뒤떨어져 온다.
그해 벚꽃이 피고 지고 참매미 수컷이 제 몸통을 떨어서 암컷에게 구애할 때쯤 완전히 헤어졌다. 더이상 그 애 마음을 돌릴 말도 염치도 나에게 있지 않았다. 이별하고 무지하게 책이라도 읽었으면 연연하지 않았을 텐데, 슬픔은 연착하여 한동안 머물렀다. 그 후로 소설을 엄청 읽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으며 딱히 새로운 일에 빠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학창 시절 시험기간만 되면 도졌던 교과서 말고 딴 책 읽고 싶은 병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결혼 준비를 하는 직원과 밥을 먹었다. 남편이 타지에서 근무한다고 하여 신혼집을 어디로 정했냐고 물었다. 신랑이 사는 지역에 아파트를 마련했는데, 자신은 이전처럼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 살 거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주말 부부였다. 결혼하는데 같이 살지 못해 아쉽겠다고, 말했더니 돌아온 답이 오히려 주중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단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외로워하면서도 혼자이고 싶어 하니까. 모순적이지만 그게 사람인 걸 어찌하랴. 중요한 건 둘이 균형을 잡는 것이다. 예비 부부는 적당한 지점을 찾은 듯했다. 오래전 나를 떠난 그녀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바보야, 문제는 균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