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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May 28. 2022

이 노래

#추억 #고백 #십팔번

연회장은 소리로 찰랑였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노래방 기계가 뽑아주는 반주에 제 목소리를 실었다. 나는 일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탈출하듯이 리조트 밖으로 나갔다. 건물에서 멀어질수록 울림이 잦아들었다.


애초 기획팀 동기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그는 워크숍 장기자랑 참가자가 부족하다고 울상이었다. 내가 참가를 주저하자 또 다른 동기인 J와 같이 나가라고 제안했다. 참가자가 적어 입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과 함께.


J는 말쑥한 생김새와 달리 노래에는 젬병이었다. 그에게 얹어 가려는 복안은 폐기해야 했다. 사실 나도 어디에 명함을 내밀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각자의 사정을 따질 상황도 아니었다. 곧 우리 차례였으니까. 그때 이 노래가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쳤다. 내 오래된 십팔번이었다. 노래방 기계에 9, 6, 5, 1번을 꾹꾹 눌렀다. 익숙한 전주가 낯선 무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방에 자주 간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다. 하지만 노래방과 그다지 친하진 않았다. 노래방에 가면 마이크보다 탬버린을 잡는 쪽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률이 높은 이 나라에는 동네마다 가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프로축구 선수로 활약하는 영국인 같았다. 그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첫사랑과 대낮에 이별했다. 사실 사귀기도 전에 고백하고 거절당했으니까 이별이란 표현이 가당키나 할지 모르겠다. 햇살이 밝아서 햇살이 아주 따뜻해서 대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소주 한 병을 들이켰다. 썼다. 아주 써서 두 모금을 삼키지 못했다. 운동장에는 전날처럼 농구와 축구를 하는 남자애들로 북적였다.


그녀 없는 거리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정처 없이 걷는데 가사가 파도처럼 밀려와 내 가슴을 때렸다. 가슴 아파서 목이 메어서 안간힘을 써봐도 피해 갈 수도 물러지지도 않는 이별인가 봐. 테이의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였다. 예나 지금이나 테이 목소리에는 구슬픔이 서려 있다.


기실 노랫말과 내 상황이 맞아떨어지진 않았다. 내가 소란스레 사랑한 건 맞지만 짝사랑이었고, 애초 하늘이 그녀를 내게 준 적이 없으니 널 줬다 이내 빼앗았다는 말도 맞지 않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눈부셨던 우리 추억이랄 것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온 세상이 취한 것 같다면서 그해 여름 내내 주야장천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를 불렀다. 아마도 수백, 수천 번 부르지 않았을까. 정작 취한 건 나 자신이었다. 노래에 이별에 취해 있었다.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두 번 바뀌었다. 그렇게 입학 첫해가 기울고 있었다. 대학 동기 여럿이 술자리를 가졌던 날, 늘 그러했듯이 술자리를 파하고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거나하게 취하지도 않았는데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내주자는 마음으로 9651번을 눌렀다. 테이의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의 전주가 노래방을 가득히 채웠다. 더 이상 화면을 보지 않았다. 가사도 자막의 색이 바뀌는 것도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복의 힘은 위대했다.


나는 오선지 위에서 춤추듯 열창했다. 이 지독한 내 아픔도 우리가 사랑한 흔적인걸을 끝으로 내 무대도 끝났다. 적막했다. 잠시 후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너, 완전 테이 같았어.” 그날 이후로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는 노래방 십팔번이자 필살기가 되었다. 이 노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줬다. 세상에 거저 얻는 건 없다는 것을.


왕년의 테이가 돌아왔다. 내가 1절을 부르고 J가 2절을 부르고 끝으로 후렴구를 같이 부르기로 했다.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나는 노래에 스며들듯 멜로디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렸다. 내심 회사 사람들을 놀라게 할 자신도 있었다. 내가 왕년의 회기동 테이였다는 것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첫 소절부터 예전의 구슬픈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자막의 색이 바뀌는 걸 따라가기 바빴다. 숨을 내쉬고 참아야 하는 때도 몰랐다. 결정적으로 후렴구에서 삑사리가 났다. 눈부셨던 우리 추억이 비틀대야 하는데, 글쎄 노래하는 내가 비틀거렸다. 삑사리의 미학이란 말도 있지만 고음불가의 삑사리는 문자 그대로 삑사리일 뿐. 나와 J는 그해 사내 워크숍 장기자랑 참가팀 다섯 팀 중 대망의 5위에 올랐다. 아주 오래전 그녀를 보내줬듯 이제 이 노래도 보내줘야 할 것 같았다. 새 노래를 따라 새 사람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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