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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May 21. 2022

엄마의 다이어트

#건강빵 #이야기 #엄마

부모님이 천안 이모 댁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정체 모를 박스를 끌어안은 채 낑낑거리면서 들어왔다. 눈짓이 냉큼 받지 않고 뭐 하느냐고 힐난하는 듯했다. 박스는 꽤 무거웠다. 식탁에 내려놓고 내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안방 화장실에선 물소리가 들렸다. 내 말을 못 들으신 모양이다. 홍성 고모댁에 다녀오신 거라면, 박스 속 물건은 십중팔구 오이나 푸성귀, 쌀일 것이다. 고모는 평생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천안 이모는 반평생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게 뭐람.


"그거 빵이야." 파자마로 갈아입은 엄마가 답했다. 이 집의 동거인이라곤 아버지, 엄마, 나로 단출한 데다, 요즈음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 체중계를 들락거리면서 살을 빼야 한다고 다짐한 건 엄마였다. 그런데 한 봉지도 아니고 무려 박스째 빵을 사 오고 태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거다.


"다이어트 빵이야." 엄마는 당신의 대답이 인지부조화를 풀어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다이어트와 빵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수평선이었다. 다만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말과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치려는 듯 내게 이야기 한 자락을 늘어놓았다.


천안 어느 치과의사 이야기야. 하루 종일 환자들을 돌보느라 그 치과의사가 본인 건강은 못 챙겼다나 봐. 고지혈증이나 당뇨 수치 등이 간당간당했대. 안 되겠다 싶어서 그 집 사모님이 동네 빵집을 찾아갔대. 우리 남편이 일하느라 바빠서 빵으로 끼니를 때워서 그런지 살이 쪘다고. 설탕이랑 버터 없는 빵을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그러고 보니 빵 포장지에는 100% 우리 통밀과 국산 천일염을 사용하고 화학첨가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다이어트까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건강빵 카테고리엔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의사는 살을 뺐대?" 내가 이야기 도중에 자발없이 끼어들었다.


엄마는 당장 답을 주는 대신에 마저 들어보라고 눈짓했다. 수십 년간 드라마를 보신 내공이 느껴졌다. 엄마도 천상 이야기꾼이다. 빵집 사장님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대. 오히려 고마웠겠지. 장사도 잘되지 않는 마당에 대량으로 주문해주니까. 지금은 다이어트 빵 덕에 장사가 잘되서 그 집 아들도 아버지 일을 돕고 있대. 장사가 잘된다는 말에 굳이 치과의사의 다이어트 성공 여부를 재차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런 가정을 해봤다. 빵집 사장님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백날 떠든다고 빵이 잘 팔렸을까. 그 사실만으로는 빵이 날개 돋친 듯 팔리진 않았겠지. 건강빵을 파는 베이커리가 한두 군데도 아니고, 사람들이 네 그렇군요,라고 덥석 빵을 사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치과의사가 빵을 먹고 살을 뺐다는 이야기가 떠도니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빵집 앞에 줄을 서는 것이다.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사실에 그치기 쉽다. 하지만 이야기는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느껴지고 발 없는 말처럼 널리 퍼진다. 그렇다. 이건 스토리텔링 교과서나 마케팅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이 없는 이야기다. 빵집 사장님의 치밀한 마케팅이든 아니든 간에, 이야기가 진짜든 지어낸 것이든 아무도 토를 달지 않겠지. 이야기를 듣고 할 일은 빵을 살지 말지 결정하는 일일 테니까. 고민은 배송을 늦출 뿐이라는 노라조의 노래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도 그렇지 왜 이리 많이 샀어요?"

내가 실없는 잔소리를 했다.

"얘, 니 이모랑 외숙모도 샀어. 이제 이걸로 아침 먹고 살 뺄 거야."

내가 다시 물었다.

"이모랑 외숙모도 한 박스씩 샀어요?"

엄마가 멋쩍은 듯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니, 우리는 50개 들이 한 박스 샀고, 니 이모는 한 박스 사서 외숙모랑 나눴지."

엄마는 겸연쩍은지 거실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았다. 그래요, 엄마 다이어트 한 번 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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