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제목이 그 모양 그 꼴이지

by 김민호

한창 보고서에 삽입할 차트를 고치고 있을 때, 외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채근하듯 울려 대는 유선 전화를 보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금요일 오후 전화는 유쾌하지 못해서다. 그렇다고 직장인이 사무실 전화를 받지 않을 도리도 없다. 파워포인트 바 차트에서 시선을 거두고 전화를 받으니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 남성은 보고서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남자는 이웃 기관에서 평가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와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스며들었다. 더구나 기관 평가에서 1등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한껏 추켜세우는 통에 아찔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 받은 시범 평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 소식을 건너 건너서 전해 들었지만 말을 아꼈다. 통화 말미에 나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털고, 무례하지 않게 들리도록 대답했다. 내게는 권한이 없으니 상부에 보고하고 회신하겠다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보조 서랍장 한 켠에 쌓아 둔 시범 평가 보고서를 꺼내 봤다. 밤샘하다시피 보고서를 쓴 게 벌써 달포 정도 되었다. 막판까지 수정을 거듭하고 재인쇄하는 난리를 치렀을 때에는 그럭저럭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리 탐탁하지 않았다. 특히나 제목이 가시처럼 걸렸다. 내 딴에는 나름의 원칙을 가슴에 새기고 제목을 달았지만.


첫 번째, 핵심 메시지를 명료하게 드러내려고 했다. 실적 보고서 특성상 결론이 핵심 메시지다. 이를테면 제도를 새로 도입하고, 사업을 유치하고, 기술을 이전한 과정이 아닌, 결과가 중요하다. 어떤 일의 최종 목적지가 아닌 경유지를 제목으로 달면, 이런 말을 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시 말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어디 갔는지 말해야 한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아하, 하면 욕 먹는다.


두 번째, 핵심 메시지를 간결하게 쓰려고 했다. 스스로 필터가 되었다. 나는 세 가지를 걸러 내려 눈에 불을 켰다. 불필요한 수식어와 중복하여 사용한 단어, 없어도 말이 되는 조사다. 아무래도 가장 강력한 유혹은 수식어일 것이다. 특히나 실적에 자신이 없을 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을 때 수식어의 유혹에 빠진다. 나중에 뜨거운 머리가 식은 뒤에야 알게 된다. 말 그대로 불필요하다는 것을. 가독성만 떨어뜨린다는 것을.


세 번째, 과장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실적 보고서의 목적은 평가다. 피평가자 입장에서 자랑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인지상정이다. 당연하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욕심이 나니까. 하지만 그 자랑이 평가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수 있다. 피평가기관은 최대, 최고, 최초의 성과를 냈다고 자랑하기 마련인데, 보고서대로라면 대한민국은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어야 한다. 자랑하지 말자는 건 아니다. 자랑하되 낯 뜨겁지 않게 담백하게 하자는 것이다.


원칙이 교과서적이라고 결과도 교과서적이지 않은 법. 보고서를 보면 볼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불안은 확신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제목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궁리하다 얼마 전 학보사 단톡방에 올라온 조간 신문 1면이 떠올랐다. 요샌 회사에서도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데, 학보사 고학번 선배님이 매일같이 주요 신문 1면을 올리신다. 덕분에 겨우 종이 신문을 구경한다.


그날은 중동 전쟁 휴전 기사가 1면을 도배했다.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이미지를 넘기며 기사 제목을 살펴봤다. 대체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중단시킨 트럼프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대동소이한 제목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인공지능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MS의 코파일럿에 여섯 개 신문사의 기사 제목을 제공하고 최우수작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답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최우수작을 공개하기 전에 안타깝게 수상에 실패한 작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힘 앞세운 트럼프 “중동전쟁 휴전”

‘12일 전쟁’ 트럼프가 강제 종전

압도적 힘 앞세워… 트럼프 “중동, 휴전”

이란이스라엘, 12일 만에 휴전… 일단 ‘봉합’

이스라엘-이란 휴전, 힘으로 밀어붙였다… 트럼프의 ‘종전 쇼’


최우수작은 이랬다.


트럼프의 망치, 휴전 이끌어냈다.


단번에 알아챘겠지만 트럼프의 힘, 그러니까 그의 리더십을 편집자들은 부각시키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강조의 빙법이 달랐다. 단 한 곳만 은유법을 썼다. 힘을 망치로 바꿔 쓴 것이다. 나는 수작과 범작을 가른 은유의 직조공은 성실과 창의라고 생각했다. 편집자가 트럼프의 망치 아래 주석으로 밝혔듯 미국의 작전명은 미드나잇 해머다. 그는 작전명을 보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 순간 미국 소프트 파워의 아이콘 어벤저스의 토르가 떠올랐을 테니까.


그제서야 보고서 제목이 그 모양 그 꼴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건 지식이나 스킬의 문제는 아니었다. 언젠가 배드민턴 국가대표 안세영 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3년간 배드민턴을 하루도 안 쉬었어요. 그래도 안 되었으니 더 열심히 해야 되는 거죠. 그녀가 그랬듯 일단 열심히 하고 볼 일이다. 한 번, 한 번 더 해야 알게 되고 알면 어렴풋이 보이지 않을까. 무엇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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