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대학원 (2)
강의실 문 앞에 겨우 도착했다.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고 핸드폰을 봤다. 강의 시작 5분 전이었다. 안을 죽 훑어보니 선뜻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주저하는 사이 뒤에서 학생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강의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무대로 끌려 나온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맨 앞줄 창가 자리에 앉았다. 행여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 봐 바로 가방을 주차 금지 고깔 마냥 올려놓았다.
괜히 목 스트레칭을 하는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마다 노트만 한 크기의 은은한 불빛을 내는, 얇은 화면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태블릿이었다. 가방에서 오래전 미국 대학 방문 기념으로 산 빨간색 노트와 볼펜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왠지 이걸 세상에 내보이면 천 개의 눈동자가 내 뒤통수에 와 박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 학기를 앞두고 줌으로 열린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조교님은 대학원 졸업 요건을 설명하고 선수 과목을 수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보통 선수과목이라고 하면 학부 시절에 심화과목을 듣기 위해 채워야 하는 필수 요건이지 않는가. 대학원생이 왜 선수과목을 수강해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데, 조교님의 말이 이어졌다.
경영학 비전공자가 이수 대상이며, 학부 수업으로 수강해야 한다는 것. 그 말은 오랜만에 학교 갈 생각에 들뜬 아저씨 마음에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이 말인즉슨 20대 학부생들과 섞여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조카 뻘인 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민망하고 쑥스러웠다.
학생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요새는 팀 과제도 많을 텐데 나를 뭐라고 소개한담. 복학생은 얼토당토않고 조교로 보이기에는 일백 번 생각해도 눈가 주름살이 마음에 걸렸다. 이따금씩 신문 피플면에 실리는 만학도 말고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만학도로 불리려면 60대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나.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한 채 핸드폰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학부 수업은 당연히 낮에 개설되어 있었고, 강의 시간은 주 2일로 나뉘어 있었다. 왜 학교 당국은 고작 세 시간짜리 강의를 둘로 쪼개 놓았을까. 이건 불과 1년 전 새벽부터 밤까지 책상에 붙들려 있던 신입생들의 체력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또 요즘 많은 회사에서 유연근무제를 시행한다고 해도 직장인이 주 1일도 아니고 주 2일이나 일찍 퇴근한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공 주임 교수님은 선수과목을 세 개나 지정해 놓은 상태였다. 물론 이 모든 건 내 사정이지만 말이다.
빨간색 노트와 볼펜을 꺼내지도 못하고 도로 넣지도 못한 채 창밖을 내다봤다. 멀찍이 산자락에 무더기로 핀 개나리, 중정에서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무리들, 백팩을 메고 바삐 걷는 학생들. 저들은 지금이 인생에서 얼마나 찬란한 때라는 걸 알까.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고 아련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20대의 나를 생각했다.
신입생 시절 학과 동기 대부분이 과 동아리에 가입할 때, 나는 무소의 뿔처럼 학보사에 지원했다. 과 선후배 간 촘촘한 네트워크가 주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뒤로한 채. 기자로 활동하면서 외부인으로 어느 취재 현장에 가도 주눅 들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기는커녕 제 집 안방 마냥 활보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해외여행에 가면 부러 호텔 대신 호스텔에 묵었다. 여러 명이 한 방에서 묵어야 해 불편하기도 했지만,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 구속받지 않았던 어린 내가 새삼 첫눈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커지긴커녕 작아지는 것 같아 씁쓸했다. 조직 생활을 하면서 사회화가 가속화되기 마련이고, 조직의 규칙과 관습 따위를 배우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이런 어른으로 성장하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말로 하기 어려운 떫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인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강단 위에 교수님이 서 있었다. 나는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던 터라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꾸벅 인사를 했다. 교수님은 나를 보더니 가볍게 아는 체를 해주었다. 곧이어 스크린에 강의 자료를 띄우고 오리엔테이션에 들어갔다. 나는 빨간색 노트와 볼펜을 조심스럽게 꺼내, 누가 볼세라 몸과 팔로 노트를 가린 채 안내 사항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