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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Feb 14. 2022

겨울은 간다

영화 <봄날은 간다>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은 잘 버틸 수 있는데

겨울은 유독 버틸 힘들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겨울엔 더 많이 울었다.

겨울의 추위 속에서 나는 점점 약해져만 간다.





스무 살이 된 이후 겨울들은 너무 추워서 버틸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눈 사람 만들러 가자.


어른이 되고 타지에서 보내는 겨울은 혼자서는 버틸 힘을 주지 않아서 의존할 것들을 찾아야만 했다.

이 공간은 서울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곳. 이곳에서 살아간다면 난 괜찮을 테지.


계절이 주는 공포감은 생각보다도 더 커서 자꾸만 다음 계절을 상상해야 했다.

이 겨울은 언젠가 끝이 날 테고 곧 새로운 해가 시작될 거야.



그리고 시간은 생각보다도 더 느리게 간다. 그중에서도 겨울은 가장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흐른다.



혜화는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사랑에 빠진 공간. N의 대학과 함께 보금자리가 있던 그곳을 처음 방문하던 때. 혜화와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혜화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혜화역 4번 출구.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혜화동 로터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그럼 성균관대가 나온다. 성균관대를 가기 전까지 곳곳에 놓여 있는 떡볶이집과 카페들. 그리고 와플집. 성균관대 법학관으로 가는 높은 언덕들. 법학관 옥상에 올라가는 순간 보이는 서울의 야경들.


1번과 2번 출구로 나가면 보이는 마로니에 공원과 극장들. 더 올라가면 보이는 수많은 언덕들. 그리고 그 위의 낙산공원. 낮의 낙산과 밤의 낙산은 각기 다른 냄새와 색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름의 낙산과 겨울의 낙산 역시 다르다. 낙산은 그런 곳이다.


이런 혜화기에 겨울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나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혼자 살아야만 했을 때 혜화를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혜화의 겨울.

정사각형의 조그만 방에 혼자 남아있게 되자 누르고 있던 두려움들이 몰려왔다. 이 겨울에, 정말로 혼자 살게 되다니. 이 겨울을 혼자 버텨나가야만 한다니. 혼자 잠에 들어야 한다니.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을 일들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버겁고 힘든 일이었다. 그땐 그랬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일주일에 5일 동안 두 가지 일을 했다. 평일엔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주말엔 학원 강사를 했다. 평일 저녁마다 신촌으로 가서 커피를 뽑았으며 주말 아침마다 동작역을 갔다. 신촌에서 다시 혜화로 돌아오는 밤은 추웠고, 주말 아침마다 동작역에 내려 학원으로 향하는 허밍웨이는 더 추웠다.



밤 11시경에 신촌 역에서 혜화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오후엔 버틸 수 있었던 추위는 더 거세져서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는 이대를 거쳐 서대문, 종로를 넘어간다. 버스는 곧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다시 내리는 순간 바람은 더 세게 나를 집어삼킨다. 집을 향해 부리나케 뛰어간다. 집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게 다음날, 또 다음날이 지나고 주말이 오면 이젠 학원을 가야 한다. 아침 9시까지 가야 하는 학원은 생각보다도 더 멀었다. 겨울의 아침은 겨울의 밤만큼이나 추워서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얼어붙고 만다. 하지만, 어김없이 머리를 충분히 말릴 시간은 항상 부족했고 그렇게 급하게 역을 향해 뛰어가게 된다. 동작으로 가는 날 중 많은 날들이 시간이 없던 날들이었고, 그런날들은 대부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것도 없던 날들이었다. 자취방으로 뛰어가 다시 카드를 찾기엔 이미 꽤 시간이 흐른 뒤. 한숨을 쉬면서 아니 욕을 뱉으면서 택시를 잡는다. 그렇게 정신을 놓다 보면 학원에 도착했다. 그런 날들은 더 빨리 기운이 빠지곤 해서 혜화로 돌아갈 힘마저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혜화에 도착하면 오후가 된다. 겨울의 오후는 그 모든 겨울의 시간 속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겨울의 오후. 오후엔 조그만 정사각형 방에까지 햇빛이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그날 사온 포도, 과일 시장에서 떨이로 팔곤 했던 그 포도를 먹었다. 그렇게 먹다 보면 금세 오후는 가고 다시 밤이 찾아왔다.





 잠에 든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침대에 누워 오른쪽을 바라본다. 바로 문이다. 왼쪽은 바라본다. 벽, 그리고 부엌이 보인다. 이사한 지 며칠 만에 현관문의 배터리가 나간 적이 있다. 문을 조금 열어놓고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향해 뛰어간다. 1분도 안 되는 그 거리가 너무 길게 느껴져서 숨이 막혔다. 현관문 너머 누군가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1분도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나보다 먼저 정사각형 그 방에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침대에 누우면 항상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놓았다. 현관문을 등지고 눕는다는 건 은근한 용기를 요구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저 현관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그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겨울의 밤보다 더 차가운 시간이 될 것이라는.



밤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다. 금쪽이 와 슬픈 영화들을 틀어놓고 거기서 나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리고 생각하는 거야. 내일 겨울의 아침은 지금 이 밤보단 덜 추울 테지. 더 나은 아침이 될 거야 와 같은 것들의 상상들.




그리고 다시 여러 밤이 흘렀다. 어느새 겨울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갔다. 봄이 됐으며 패딩이 아닌 코트를 입었다. 코트가 아닌 재킷을 입었고 재킷마저 벗고 셔츠만을 입을 때가 왔다.


그렇게 셔츠가 아닌 반팔을 입게 됐을 때 나는 혜화에서의 생활을 정리했다. 혜화의 삶들을 정리하고 엄마와 아빠가 있던 나의 원래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여러 일들이 있었고, 시간은 흘렀다. 나는 다시는 혜화를 사랑할 수 없게 됐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은 스물둘과 스물셋, 혜화에서 보낸 겨울의 이야기. 그리고 나는 어찌어찌 그 겨울을 버텨내고 스물넷이 됐다. 그리고 스물넷이 된 나에게 바로 겨울이 도래한다.


스물넷의 겨울에서 나는 지난 시간들을 훑는다. 내가 버텨온 그 수많은 겨울들을.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수잔은 에드워드에게 말한다. '본인 말고 다른 것에 관해 써보는 게 좋겠어.'

그러자 에드워드는 답한다. '아무도 본인 이외의 것은 못 써.'


나 역시 모든 글은 나에 관한 이야기. 계절과 사랑, 그리고 두려움이 아니면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  


그럼에도 내가 겪어왔던 겨울들은 나에게 글을 쓰게 만든다. 겨울은 나에게 두려움, 그리고 두려움 두려움 끝도 없이 깊고 짙은 두려움들을 주었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었다.


두려움 끝에 남은 그 조그만 사랑으로 인해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겨울은 간다. 사랑을 남기고.





* <교차로입니다 서행하세요>의 열두 번째 글입니다. 이 매거진은 같지만 다른 점이 많은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각기 다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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