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체제의 유산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쌀, 재난, 국가》를 읽고
지난해 3월 <시사in>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교와 같은 집단주의 의식이 코로나19 방역 대응에의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서구의 주장과 달리, 민주적 시민성이 방역 대응 참여의 주된 요인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갑자기 서구 민주주의에서는 민주적 시민성이 사라지고 동아시아에서 사회적 자본이 효과를 낳았다는 것은 듣기에는 좋지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코로나19 방역 대응 과정에서 한국인의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해졌다는 결과도 나왔다. 민주적 시민성 발현의 귀결이 권위주의 강화라는 것은 방역 초기와 후기라는 시점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상이다.
반면, 이철승 교수는 방역에의 호응 요인을 민주적 시민성에서 찾지 않고, 동아시아 벼농사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밭농사와 달리 논농사는 치수(治水)가 매우 중요한 데다가, 평시의 국가의 목적은 물을 잘 가두고 관리하는 것에 그쳤다면, 가뭄이나 태풍 등 재난 시기에는 재해의 영향을 잘 대비하고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이 국가의 주된 목적이었다. 이러한 벼농사 특유의 국가상 덕분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보다 비교적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 속에 팬데믹에 잘 대응하고 있다. 즉, 개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 사회를 조직한 서구의 사회 계약과 달리, 재난으로부터 집단 보호를 위한 동아시아의 사회계약이 팬데믹 대응에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철승 교수는 벼 문화에는 벼농사 체제 특유의 공동생산-개별소유 체제에서 기인한 질시의 성정이 있다고 말하는데, 서로 집안의 젓가락 개수까지(쌀 수확량까지) 아는 농촌 사회에서 협력도 나타나지만, 경쟁과 질시도 나타난다. 동아시아의 주변 사람의 자신에 대한 평가를 고려하는 눈치 문화가 여기에서 기인했으며 이는 팬데믹 대응 과정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농촌 사회의 두레, 품앗이 등으로부터 협력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안의 경쟁과 질시는 매우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한편, 이철승 교수는 벼농사 체제의 유산 중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에 강조점을 두는데, 그러한 위계질서가 산업화 시기에 기업의 연공제 도입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연공제는 압축 발전의 시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 연차에 따른 임금 격차가 큰 연공제가 기업들의 정규직 채용 감소 및 비정규직 채용 증가, 그리고 이로 인한 세대와 성별 등에 따른 불평등의 심화를 이끌었다. (물론, 연공제가 불평등의 유일한 요인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또한, 산업화 세대의 연공제는 민주화 이후의 공정성 담론에 민감한 청년 세대와 큰 충돌을 겪고 있으며 일의 효율성도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만약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가 벼농사에서 기인한 문제라면 밀을 주식으로 삼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다행히 《쌀, 재난, 국가》는 그러한 운명론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벼농사 체제의 유산 중 협력과 같이 유용한 것은 극대화하면서 연공제와 같이 사회 발전의 걸림돌은 청산해 가자고 말한다.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마을이 쌀밥에 고깃국 계속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쌀, 재난, 국가》를 처음 접했을 때에도, 이철승 교수의 인터뷰를 읽었을 때에도 이 책이 굉장히 읽기 힘들 것 같아 긴장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다양한 예시와 그래프, 그리고 역사적 설명 등과 함께 제시되어 큰 어려움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개념을 구성하는 용어는 어렵지만,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질문을 '우리'가 공감할 내용으로 친절히 설명해준다. 다만, 책의 후반부가 다소 연공제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뤄 비교적 큰 주제를 다룬 전반부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느낌은 받았다. 그러나 지엽적인 비판 속에서도 벼농사 체제의 유산이라는 큰 주제를 계속 논했고, 덕분에 전작인 《불평등의 세대》와 저자가 차기작으로 예고한 《불평등의 극복(가칭)》에 관심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