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상을 바꾸는 건 자본가들이었다. 활동가나 진보 진영의 역할도 분명 있었으나 어떤 개혁의 실질적 구현은 자본가들이 그 필요정을 느끼고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에야 일어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기후위기 대응 역시 자본가에 대한 고려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빌 게이츠의 활동은 주목받아 마땅하다. 특히, 지구를 떠날 준비를 하며 지구를 망치는 베이조스, 머스크 등과 비교하면 더더욱.
빌 게이츠가 책에서 말하는 핵심은 '혁신'이다. 각종 기술과 정책의 혁신을 통해 넷제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전기 생산에서는 재생에너지 사용의 확대와 원자력, 배터리, 수소 전기 등의 혁신을 통해, 제조에서는 시멘트, 철강의 제조 과정에서의 혁신을 통해 탄소 배출을 막고 탄소를 줄이고자 한다. 정책은 탄소 배출에 책임을 묻거나 신기술 개발을 지원함으로써 위의 혁신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 과정에서의 취약 계층을 보호한다.
빌 게이츠의 제안들은 분명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으나, 한계점이 뚜렷이 보인다. 우선, 엔지니어 특유의 사고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가에만 집중하여 주변에 미치는 영향들을 놓치고 있다. 예를 들어 생산 과정에서의 만들어지는 탄소의 절반 정도가 플라스틱 내부에 남기에 플라스틱 사용은 괜찮다는 주장은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문제를 (인식은 하고 있지만) 과소평가한다.
또한, 자본가로서의 막대한 책임을 말하지 않는다. 빌 게이츠는 그린 프리미엄(그린 에너지 기술 사용에 따른 추가 비용)을 줄이는 것에 엄청난 주의를 기울이지만, 누구의 돈으로 줄일 것인가는 소홀히 다룬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탄소 배출의 대부분은 부유한 국가, 그리고 부유한 계층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그 책임 또한 부유한 계층에 묻는 것이 옳다. 단순히 앞으로의 탄소 배출에 관한 책임을 세금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묻는 것뿐이 아니라, 탄소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로부터 큰 이익을 얻은 (빌 게이츠와 같은) 자본가에게 그 책임을 강하게 물어야 한다.
물론, 빌 게이츠는 재단의 운영이나 투자를 통해서 기후위기 대응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사회에서 살기 위해 자본가의 선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러한 자선 행위가 모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가의 평판과 더 많은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착한 자본가를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겠는가?
결국, 기후위기 해결에 있어서도 민주주의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자본가가 세상을 바꾸지만, 바뀐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 자본가들을 민주주의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책임을 올바르게 물으며 배제된 자들을 정치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어야만 살기 좋은 세상으로의 '정의로운 전환'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