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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민 Nov 06. 2021

새로 상상하고 거칠게 나아가는 진보의 이념

《진보의 상상력》을 읽고

 지난해 총선, 정의당은 청년 비례대표 의석을 명부 1, 2번에 배정했고 이를 통해 류호정과 장혜영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장애인, 여성, 청년 의제 등 노동에서 다소 벗어난 사회적 소수자 의제들을 당 활동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류호정 의원과 장혜영 의원은 당선 이전부터 이어진 비난과 조롱에도, 소수자 의제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이제는 여영국, 배진교 등보다 먼저 떠오르는 정의당 대표 정치인이 되었다.


 하지만 탈물질주의 의제들은 기존의 노동 의제와 공존에 성공했을 뿐, 화학적 결합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로 인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문 논란 같은 당내 갈등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을 딛고 정의당과 진보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위협들에 대응하며 미래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노동 의제와 탈물질주의 의제를 화학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적 틀을 마련해야만 한다.


  《진보의 상상력》은 새로운 이념적 틀을 만들기 위한 길을 찾아간다.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의 김병권 소장은 "새로운 진보의 헤게모니를 위해 여전히 '노동자 중심'이나 '자주 평화' 같은 과거의 틀로 경합과 헤게모니의 경계선을 그어야 할까?"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그는 '디지털-기후위기-불평등'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위협 앞에서 다층적 차원의 인과관계에 따른 역동적인 '가능성의 역사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디지털 플랫폼' 경제에 관해 김병권 소장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구호 아래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바꾸고 노동 구조조차 뿌리 뽑는 와중에, 진보는 "경제 개혁에 관한 이니셔티브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처럼 '디지털 플랫폼' 경제 대응에 늦었다고 말한다. '디지털 혁신가'들이 위험을 사회에 떠넘김으로써 수익을 창출하고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독점을 강화했다. 노동자는 독립 사업자로 불리며 자신을 노동자라고 부를 수조차 없이 불안정 노동에 몰렸으며, 완전 고용에 기반한 복지 체계도 한계에 다다랐다.


 김병권 소장은 진보가 디지털 경제 자체를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기술이 사회를 지배하도록 기술낙관주의에 빠질 것이 아니라, 사회가 기술을 지배하도록 진보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진보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혹은 사기업이냐 국영기업이냐 하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유 형태나 새로운 플랫폼 등을 연구하고 실험하며 고민해나가야 한다. 또한, 산업주의적 노동관에서도 벗어나 노동자 개념을 '일하는 사람'으로 확장함으로써, 비정규직뿐 아니라 불안정 노동자나 긱 노동자 등도 포괄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술 혁신에 대한 사회적•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질 때 플랫폼 경제가 약속하는 편리한 미래도 사회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

 기후위기 또한 진보가 집중해야 하는 중대 사안이다. 탄소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이행과정에서 불평등을 동시에 해결하는 진보의 강력한 전환 전략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대응 전략은 에너지 전환 전략이자, 국가의 역할이나 목표 등 철학적 논의들마저 모두 새로 구성하는 작업이며, 시민들의 삶에 급진적 변화를 초래하는 거대 전략이다. 그런데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이 고소득자가 더 큼에도 그 피해는 저소득자들이 더 크게 겪으며, 이들은 탈탄소 전환 과정에 대응•대비할 역량도 작아 전환의 피해를 볼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기후위기 대응은 불평등 대응과 함께 이루어져야만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성공할 수 있다.


 이 글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대의 위협에 맞선 정의당 혹은 진보의 새로운 틀은 무엇인가.  결국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경제가 부와 권력의 집중을 가속화하여 사회 불평등을 강화하지 않도록, 기후위기 대응이 책임과 대응 역량에 따라 정의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진보의 새 역할이자 이념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나아가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를 둘러싼 위계적 불평등을 조정함으로써 인정투쟁이 분배투쟁이나 기후위기 대응과 함께 하도록 한다면, 물질주의 의제와 탈물질주의 의제의 화학적 결합을 도모할 수 있다.


 다만, 그 결합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치 활동의 가치에 대한 재구성이 필요하다. 과거 진보의 관점에서 정치 활동은 생산수단 소유를 둘러싼 경제적 하부구조 위에 쌓인 상부구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시각으로는 계급, 지위, 환경 등 다양한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지금의 문제들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렵다. 경제적 토대의 전환으로부터 이끄는 변화와 더불어 정치•문화 활동의 역할을 함께 선도할 때 진보의 새로운 틀이 공고해질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를 이루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같은 이념 틀은 중세 시대로부터 이어진 유럽의 국가 조직과 유럽의 산업혁명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20세기 이념에 따른 국가 기구와 새로운 사회 사이의 간극을 목도하고 경험하며 고통받고 있다. 오늘을 헤쳐나갈 철학은 무엇인가에 답하기조차 힘들다. 이제 진보가 그 이념적 틀을 상상할 시간이다.


 보수에 딸려가던 댓글 정치를 버리고 우리가 직접 만드는 미래로 거칠게 나아가자. "진보란 과거에 쌓아온 지식이나 경험으로 미래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기획이 아니다. 진보는 미래를 상상하며 현실에서 그 단서를 찾아 나가는 거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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