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누나가 전화가 와서는 어머니께 전화를 한번 드리란다. 가슴 한편이 미어졌다.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잠긴 목소리로 보아 주무시다가 일어난 것 같았다.
요즘도 집에 지네가 들어와서 살집을 물어뜯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작년보다는 심하지 않다고 했다. 가끔 가다가 한 마리씩 기어들어온다고 했다. 나는 쇼핑몰 사이트에서 지네 박멸 살충제를 저렴한 가격에 파니까 동생에게 말해서 사서 뿌리라고 했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살충제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생신이라고 해서 전화했다고 말했더니 어머니는 아 그래, 하고 짧게 대답을 했다. 미역국 먹었냐고 물었더니 먹었다고 한다. 그다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주말 잘 보내시라고 했다. 어머니도 나에게 잘 보내라고 말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몇 시간 뒤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나는 대답을 조금 퉁명스럽게 했다. 왜냐하면 나를 압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생일 축하를 의무감으로라도 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폭력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점점 격앙되었고 나는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부모님 생일을 챙겨 준 적이 없다. 어머니는 거창하게는 해주지는 않았지만 내 생일 때마다 미역국은 끓여주었다. 내가 집을 나온 지 오래되었으니까 그것도 꽤 예전의 일이다.
가끔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생일을 챙겨주었다. 선물도 가끔 받아봤고 축하한다는 소리도 들어봤다. 그때마다 이상하게 무덤덤했다. 축하한다는 말에 뭐라고 대답은 해줘야겠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몰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늘 난감했다. 그때마다 축하받는다는 기쁨보다는 축하해 주는 상대방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생일파티를 한 번 해준 적이 있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다. 어머니는 누나와 나에게 친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라고 했다. (참고로 누나와 나는 쌍둥이다. 그래서 생일이 같다.) 그날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서너 명의 친구들이 가겠다고 대답했다. 당일 초대라서 그런지 친구들은 우리 집에 와서도 선물을 못해줬다면서 미안해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생전 처음 맞이하는 생일 파티라 들뜬 마음이었다. 생일 파티가 끝나고 친구들과 밖에서 좀 놀다가 저녁 늦게야 들어왔다.
아버지가 일을 끝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기분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부장이었던 아버지는 갑자기 집 안 물건들을 집어던졌다. 다짜고짜 욕지거리를 퍼붓고 손찌검을 했다. 아버지는 다시는 생일 파티를 하지 말라고 했다. 집 안이 생일 파티로 인해 어질러졌다는 게 이유였다. 그 이후로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생일 파티를 한 적 없다.
나 역시 부모님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말 한 적 없고 그건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동생과 누나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각자에게 그런 말 한마디 안 하고 살았다. 그게 일상이었고 그 무덤덤과 무관심은 어느새 집 안의 보이지 않는 법칙처럼 자리를 잡았다.
누나는 아마 그 경직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해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자식 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고.
오래되었다. 교회를 나가던 시절이었다. (신앙심은 거의 없었다. 친구 때문에 의무적으로 나갔다. 좋은 사람도 많았고 예쁜 누나들도 많았다.) 교회에서는 달마다 생일인 사람에게 예배가 끝난 다음 축가를 불러주고 선물을 주며 당사자의 소감을 묻는 행사를 진행했다. 나는 내 생일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교회를 나가지 않거나 자리를 피하고는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는다는 사태가 민망했고 이상하게 쑥스러워서였다.
그런데 꼭 참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날이 있었다.
다음 날이 주일이었고 그 전날 길을 가다가 낙태 근절 운동에 관련된 전단을 받았다. 전단에는 일 년에 걸쳐서 벌어지고 있는 낙태 시술 빈도와 하루에 얼마나 많은 태아가 죽임을 당하는지 그리고 세계에서 낙태율이 가장 높은 한국에 대해서 팔 다리가 잘려나간 태아들의 사진과 함께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시되고 있었다. 적나라한 사진 내용에 큰 충격을 받은 나는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다음 날 그 매너리즘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섰다. 앞사람의 생일 소감이 끝나고 들뜬 분위기 속에서 사회자는 나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나는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어제 받은 전단지의 내용에 대해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지금 내 생일을 축하해 주기 보다 자신의 생일날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죽어가고 있는 태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말했다. 순간 교회 내는 조금 조용해졌다. 그때 바라다보이던 사람들의 무심한 눈빛에서 나는 순간 내가 이방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회자는 서둘러 다음 순번자에게로 마이크를 내밀었다. 분위기는 다시금 화기애애해졌다. 사람들은 다들 그 분위기에 만족해했다.
행사가 끝나고 자리로 들어오자 곁에 있던 교회누나는 좋은 말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생각했다.
치기 어렸던 시절이었다.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생일들을 보고 경험하며 살아왔다. 카페나 주점을 빌려서 성대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조용한 곳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선배가 후배에게, 후배가 선배에게, 학생이 교수에게 깜짝파티를 해준 경우도 많이 봤고 친구들끼리 모여서는 서로 진탕 취해 동이 틀 때까지 그러니까 6, 7차까지 술자리를 이어가는 경우도 봤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생일 파티를 하고 있을 것이고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들의 수에 따른 자신들의 인맥관계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거나 아쉬워하고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유명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그 소설에는 개에게 물려죽은 소년을 취재하는 기자가 등장한다. 이 소설이 나로 하여금 그 소년에 대한 옛 기억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허구가 아니라 몇 년 전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그 일을 소설 안으로 다시 가져온 것이다.
나는 그 사건 기사를 다시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경기도의 한 시골에 사는 9살 소년이었다. 부모는 소년이 한 살 때 이혼을 했고 집을 나갔다. 가난한 조 부모가 비닐하우스를 개조해 소년을 키웠다. 키웠다기보다는 그냥 방치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어쩔 수가 없었다.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다. 조부모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 동안 다른 지역으로 농사일을 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밥을 한꺼번에 해서 밥솥에 얹혀 놓고 나가곤 했다. 소년은 그 밥을 잘 먹지 않았다.
소년은 3학년에 올라와 감기 몸살로 딱 한 번 결석을 한 것 말고는 착실히 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장래희망이 축구 선수였고 평범한 아이였다. 학교와 비닐하우스와의 거리는 어른 걸음으로 약 40분이 걸렸다. 소년은 매일 그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소년의 주검이 발견된 곳은 집이었다. 집에서 조부모가 사육하던, 소년이 직접 밥을 챙겨주던 도사견에게 물려 죽었다. 소년이 학교에 나오지 않자 담임이 소년의 집 비닐하우스를 방문했던 것이다.
소년은 비닐하우스 현관 바로 안쪽에서 양말만 신은 채 상, 하의가 모두 벗겨져 있었다. 소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드려 있었다. 몸에는 수십 군데 깊은 상처가 패어져 있었고 개에게 물린 채 끌려다니며 긁힌 자국도 선명했다. 비닐하우스 밖 마당에는 찢겨진 소년의 옷가지와 책가방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발견된 소년의 일기는 서툴렀고 단문이었다.
오늘은 신발이 더러워서 빨았습니다, 다 말라서 그래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할머니가 샌들을 빨라고 했습니다, 비누를 가지고 와서 빨았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용서 해주세요, 차칸 oo이가 대게요.
일기 내용으로 보아 소년은 거의 빨래나 청소를 자기가 직접 했던 것으로 보였다. 혼자 집에 있는 게 싫어서 소년은 늘 밤늦게까지 밖을 서성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소년은 교사가 "밤에 무섭지 않냐, 밥은 먹었냐"고 물으면 밝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답했다고 한다.
며칠 뒤 그 기사를 보고 나는 멍해졌다.
소년이 개에게 물린 채 끌려가고 있을 때, 물려 뜯기고 있을 때, 나는 그날 지인의 생일에 참석해 술에 취한 채로 하나 마나한 농지거리나 주고받으며 히득거리고 있었다.
소년도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분명 생일이 있었을 것이다. 소년은 생일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니면 잊어버리려고 했을까. 그리고 막상 자신의 생일날 뭘 하고 있었을까.
그 어두컴컴하고 차가운 비닐하우스 안,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우두커니 앉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조그만 손으로 묵묵히 자기 빨래를 하고 밥을 해서 먹고 숙제를 하고 있었을까. 누가 미역국은 끓여 주었을까. 누가 가장 보고 싶었을까.
소년이, 어머니가 재혼한 뒤 동생 둘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지금에 와서 확인할 길이 없다고 기사는 전했다.
오늘도 누군가가 생일을 맞아 지인들과 함께 즐기고 있는 밤, 소년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제서야 나는 그때 교회에서 했던 말들을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