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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Nov 09. 2024

당신의 얼굴 (2)

단편소설



이틀 후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 몇 개의 독촉장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신발을 벗으며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머니 앞으로 온 독촉장이었다. 스멀스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독촉장이 날아온 사실. 즉, 아버지가 어머니의 카드를 몰래 들고나가 도박장에 쓰고 다닌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집이 경매로 넘어간 사실을 알았을 때 아버지는 벌어서 갚으면 되지 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그래도 난 네 아버지야,라고 했다. 그 네 아버지야 라는 말이 가슴팍을 파고들어 지금까지 거미줄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다. 나는 아버지 앞으로 온 나머지 독촉장들을 집어서는 잔뜩 구겨버렸다. 
거실이라고 해봤자 세 평 남짓한, 부엌과 겸한 곳이다. 그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고기 구웠던 냄새가 콧속으로 옅게 배어들어 왔다. 오늘이 어머니 월급날이었던가. 싱크대 개수대에는 고기를 구웠던 프라이팬, 기름장 접시, 밥그릇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옷을 추스르며 밖으로 나올 때 화장실 거울에 언뜻 내 얼굴이 비쳤다. 뜬금없이 나는 그게 내 얼굴인가 싶어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일찍 왔네. 후번 근무자가 일찍 와서요. 시선이 마주친 어머니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머리 그렇게 해서 다니지 말라고 해도 또 그렇게……. 어머니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덥수룩한 게 꼭 네 아버지 같네. 안 지저분하니? 정리 좀 해라. 네.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니는 싱크대 쪽을 힐끔 보고는 매트에 발을 닦으며 말했다. 너 퇴근 시간 맞추기가 참 힘드네. 다음에 같이 먹든지 하자. 어김없이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절뚝거리며 싱크대로 걸었다. 식당 주방에서 하루 종일 일어서서 일하느라 퉁퉁 부어버린 어머니의 종아리, 어머니는 걸을 때마다 종아리가 제 종아리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제가 할게요.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싱크대로 다가섰다.
설거지를 마치고 힐끔 뒤를 봤을 때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고는 거실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식당 주방에서 또 하루를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던 걸까. 어머니의 얼굴에 가득 서려 있는 아득함, 나는 바닥에 떨어진 설거지물을 걸레로 훔쳤다. 어머니 곁에 앉아 종아리를 주무르려고 할 때, 됐다. 늦겠다. 어머니는 내 손길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정수 일어나면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고 저녁 챙겨줘라. 네, 다녀오세요. 어머니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닫히다 만 현관문을 닫으려 손잡이를 잡았을 때 열린 문틈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어머니의 작고도 꾸부정한 뒷모습이 보였다. 여태까지 나를 이곳에 붙잡아온 어머니의 뒤태였다.
상 위에 널브러진 빈 약봉지를 집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한 뼘 정도 열린 문틈. 불이 꺼진 걸로 보아 동생은 내가 오기 전 약을 먹고 방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을 꺼냈다. 컵을 꺼내려 찬장을 열었을 때 포개놓은 접시들 뒤로 검은 봉지 하나가 보였다. 그 안에는 동생이 좋아하는 과자가 들어있다. 그 아래 칸, 포개놓은 밥그릇들 뒤로 새로운 검은 봉지가 하나 더 보였다. 봉지 안에는 동생의 비타민제가 들어있었다. 내가 보지 못하게 어머니가 숨겨둔 것들이다. 나는 어느새 싱크대와 찬장 여기저기를 열어보고 있었다. 
언뜻 스치다 본, 재활용품 분리수거 통에 들어 있던 것은 사, 오십만 원을 호가하는 디엠비 폰 상자였다. 속 알맹이는 어디 갔는지 껍데기뿐이었다. 한 달에 방세 이십오만 원도 제때 못 내는 걸 생각하면 기가 막혔다. 빚 갚기도 벅차면서. 
한 뼘 정도 열린 동생의 방 문틈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폰 상자를 수거 통에 넣은 다음 다가가 문을 밀었다.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서 동생이 웅크려 신음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동생이 등을 돌렸다. 엄마? 나는 불을 켰다. 동생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뒤범벅돼 있었다. 목이 풍선처럼 부어올랐고 연신 손을 떨어댔다. 형. 목이 또 이상해. 형. 동생은 내 쪽으로 기어 와 손을 뻗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동생이 쥐고 있는 새 디엠비 폰은 누군가에게 통화가 연결되고 있었다. 수신자는 어머니였다. 형아. 나 죽는 거 아니지. 형. 동생의 눈이 돌출되고 있었다. 디엠비 폰 너머에서 정수야, 정수야, 하고 어머니가 소리쳤다. 한참을 가만히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나는 천천히 물러났다.
그때 현관 쪽에서 다급히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나는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재빠르게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윽고 덜컥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급하게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왔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니는 동생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동생의 머리맡에 앉아 얼굴을 살피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쳤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폰을 집어 119 버튼을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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