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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Nov 24. 2024

관계의 아수라 속에서

에세이



주위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끊임없이 나를 교회로 나오라고 한다. 나는 왠지 구원받아야 할 것 같단다. 두세 번 정도 따라간 적이 있다. 예배라는 것을 하고 교회 식당에서 밥까지 얻어먹었다. 예배당에 모여든 사람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목사의 설교에 열광했고 신들린 듯 팔을 뻗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하며 성경 말씀이라는 것에 자신의 삶을 대입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나를 가르쳤다. 그들은 나에게 따뜻한 미소로 한결같이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는 얼마 안 가서 그들의 일관된 미소에, 행복감에 질리고 말았다. 나는 그들처럼 행복할 수도, 매사에 감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내 삶의 필연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절망과 고통의 힘으로 살아있고 그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집단과 나는 서로 교차될 수 없는 평행선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타자로서 가능하다.


요즘 시청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몰려나온다. 엄청난 인파다. 사람들은 흩어져있는 식당으로 자기만의 식성과 체질, 기호에 따라 몰려 들어간다. 들어가서 함께 먹고 나와 다시금 회사로 같이 몰려간다. 간혹 식당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데 유심히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주위를 향해 고개 돌리는 것을 어쩐지 민망해하는 것 같다. 서둘러 먹고 자리를 뜨기 일쑤다. 보통 사람들은 내색하진 않지만 그런 사람을 은근히 측은해한다. 그러면서 현재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또한 안도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몇 시간 후 퇴근을 하고 집으로 흩어져 다시금 가족공동체와 합류할 것이다. 한국의 어느 일터나 다 비슷한 광경이다.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왠지 집단과 무리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회사나 단체에 속하기가 꺼려진다. 얽히고설킨 관계 속이 답답하고, 그런 곳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반복되는 일상성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 사랑, 희망을 방패로 앞세우고 위선과 모순의 정당성을 암묵적으로 완성시켜 나가는 종교집단도 뭔가 거북스럽다.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뒤집어쓴 채로 몰려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구에 함몰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 또한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반하 듯 각 개인들은 서로 손잡고 떨어지면 안 되기라도 한 듯 단단하게 뭉쳐있다. 구원, 친절, 유대, 혈연, 사랑, 희망이 그들을 뭉치게 하는 원동력일까. 나는 이 단어들에 이상하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단어 속에 내포된 깊이 모를 허영과 허망, 따뜻하고도 친절한 강제성이 나를 진저리 치게 만든다. 단체나 무리 안에는 언제나 이처럼 소모적인 관계성이 온존해 있다. 그러다가 얽히고설키면서 가까워지고 서로 기대게 되면 어떨 때는 피차 선을 넘기도 한다. 어느 순간 아주 사소한 일에도 의지하게 되고 상처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까이에 있던 누군가가 사라지거나 사이가 틀어지면 불안해하고 다시금 기댈 수 있는 또 다른 관계를 찾아 헤맨다. 나는 그런 식으로 유랑하는 사태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되도록 혼자 돌아다닌다. 그게 편하고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득이 되는 길이다. 


미니멀리즘적 방식으로 공연 제작이나 영상 연출에 소소하게 도전한 적이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 작업을 하려면 어떻게든 집단을 구성해야 되니 말이다. 그 당시에는 집단으로 들어가 무수한 관계의 끈들을 붙잡고 특정 어젠다를 연극이나 영상의 형태로 온전히 이끌어내야 했다. 수많은 관계의 칼날이 마음속을 휘갈기고 지나갔다. 심연에 묻혀있던 삭은 감정들이 가슴을 치받고 올라오기도 하고 계통 없이 욱여드는 관계의 압박 속에 숨이 턱하니 막히기도 했다. 작업이 끝나고 나서 밀려오는 허망감 역시 견디기 버거웠다. 얼마나 더 갈고 부딪혀야 이러한 관계의 집단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세상의 근본 기반이 무리화된 공동체인 듯한데 내 바람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이 관계의 형식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살아내려면 어떻게든 적응해나가야 하는 것인가,라고 반문을 한 적이 많다.


현재에는 나름 최선의 방법으로 각 관계에 대해 적당한 거리를 두려 하고 있다. 높은 강도의 인내심, 그리고 조용한 침묵이 요구된다. 잘 되지도 않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 참 쉽지 않다. 아무려나 오늘도 관계의 아수라 한복판에 서서 이런 해답 없는 생각만 되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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