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믐 Nov 21. 2024

당신의 얼굴 (6)

단편소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부엌에 주저앉고 말았다. 싱크대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바닥만 쳐다봤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한 뼘 정도 열린 내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틈으로 보이는 방 안은 어두웠다. 어둠은 문틈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어둠은 머릿속을 암전 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 위에 모로 웅크리고 누웠다.


화들짝 열리는 문소리에 눈이 떠졌다. 비몽사몽간에 상체를 일으켰다. 어머니가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영정 속의 할머니 같기도 하고 부엌에서 홀로 일하고 있던 숙모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할머니, 숙모의 이목구비가 조금씩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할아버지와 아버지, 작은아버지의 피할 수 없는 동인인걸까. 그게 바로 핏줄일까. 
그날 정수 아픈 거 알고 있었지? 흐릿하게 보이는 어머니를 똑바로 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날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폰을 일하는 데 두고 왔어요. 정수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정수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환각 상태였다고요. 헛것을 봤겠죠. 의사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어머니는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병원 갈 거다. 이따가 구급차 올 테니까 준비해라. 아직 며칠 더 남았잖아요. 걱정돼서 안 되겠다. 어머니는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 나는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아까 내가 정리한 싱크대 서랍을 살피고 있었다. 누가 건드렸냐? 아니요. 어머니는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서랍을 뒤졌다. 어머니는 의료보험증을 꺼내 서랍을 닫고는 나를 지나쳤다. 나는 어머니의 곰 같은 잔등을 보며 화장실로 걸었다. 어머니는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집어 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제 어디서 전화 왔더라. 내가 네 어머니냐고 묻더라. 나는 화장실 손잡이를 돌리다 말고 멈춰 섰다. 학자금 대출 건으로 전화했다기에 우리 집에 대학 갈 사람 없다고 했다. 어머니의 음성이 커졌다. 넌 이제 이 집의 가장 아니냐. 대학이야 나중에 얼마든지 갈 수 있고. 뭐가 순서인지 모르겠어. 급한 불부터 해결해야지. 게다가 나한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아무튼 그렇게 된 걸로 알고 있어라. 그리고 집에 신경 좀 써라. 나는 외투에 팔을 끼며 말하는 어머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갑자기 아까 손가방에서 나왔던 동생의 통장이 떠올랐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급하게 외치던 입학처 직원의 목소리와 부모님 신용 문제 때문에 심사에서 탈락됐다는 상담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 집의 가장 아니냐,라는 어머니의 말이 매미 우는소리마냥 맹렬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성큼 부엌으로 가 힘껏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손가방을 꺼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손가방은 어머니 발치 앞까지 미끄러졌다. 손가방이 열리면서 도장과 서류, 통장이 어지러이 쏟아졌다. 나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니의 시선이 동생의 통장으로 갔다가 다시 나에게로 왔다. 어머니는 널브러진 서류와 통장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천히 손가방에 주워 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이게. 어떻게 네 아버지하고 하는 행동이 똑같냐. 툭하면 집어던지는 게. 나는 너를 잘 알아. 그래서 더욱 겁이 나. 네가 아버지를 닮게 될까 봐. ……네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데 결국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갔잖아. 언제 인간 될래.
나를 잘 안다는 말.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내 거죽만을. 내 짖겨진 눈과 매부리코, 엷은 입술, 넓적한 얼굴형을. 아버지의 얼굴을.  


  닮을까 봐, 가 아니라 닮았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나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놀랐다. 몸속 깊은 곳 어디에 그런 말을 숨겨 놓았던 건지.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얼마나 화가 치밀던지. 어머니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머뭇거렸다. 잠깐 방에 들어가 있어라. 신경 사납다. 내가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자 어머니는 내 시선을 이기려는 듯 어서 들어가라고 거칠게 삿대질을 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물러나다가 문턱에 걸려 엉덩이를 찧고 말았다. 다가오는 어머니를 피해 어두컴컴한 방안으로 엉덩이를 밀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닮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위로 내 얼굴이 겹쳐졌다. 얼굴들을 지우려 고개를 저었다. 얼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다가오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거대한 살덩어리였다. 덜렁대는 젖통과 출렁이는 뱃살, 철렁거리는 허벅지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한 젖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말할 때마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구린내에 숨이 콱 막혔다. 어느 순간 방 안이 다시 눈부시게 환해지고 있었다. 부신 빛 사이로 옅은 미소를 띤 살덩어리의 얼굴이 나타났다. 살 껍데기 위로 자글자글 흘러내리는 기름기, 살덩어리는 더욱 빛났다. 그동안 신경을 못써줬구나. 괜찮으니 가까이 오렴. 살덩어리는 입을 떼지 않고 있었으나 육성은 방 안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악취는 더욱 강도 높게 콧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리고 언제 닿게 될지 모를 가로막힌 벽을 향해 엉덩이를 꾸역꾸역 밀어갔다. 구급대가 오기를, 어서 빨간 불을 번뜩이며 집 앞에 도착하기를, 구급 대원들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오기를, 나는 빌고 또 빌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