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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Nov 18. 2024

당신의 얼굴 (5)

단편소설



버스기사가 날 흔들어 깨울 때까지 나는 내가 어디에 와서 앉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사가 종점이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버스 안 임을 깨달았다.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무슨 힘에 이끌려 작은아버지 댁에 갈 생각을 했던 건지, 기억은 어렴풋했다.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종손이라는 의무감이 날 여기까지 이끈 것일까. 꼭 와야 된다는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잠결에 나도 모르게 홀린 건 아니었을까. 앞 쪽에서 밀대를 빨아온 기사는 첫차는 다섯 시간 후에나 있다며 어서 내리라고 재촉했다. 나는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제자리에 한동안 서 있다가 작은아버지 집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수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도무지 못 올 것 같더라고요. 작은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은 가봤어? 네. 거,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작은아버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저께 작은아버지는 유학 간 아들의 생활비가 떨어져간다며 어서 이자라도 붙여 달라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자는 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지금까지 빠져나간 이자는 등록금과 맞먹는다. 작은아버지가 말했다. 어서 준비하자. 나는 작은아버지와 거실 한가운데서 병풍을 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아버지가 신발을 벗고 있었다.
제사는 자정이 넘어서 시작되었다. 남자들은 거실에 차려진 제사상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상 위에 놓인 할머니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머니와 할머니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눈매 하며 표정들이. 언뜻 보면 어머니가 사진 속에 들어가 있는 착각까지 인다. 어느새 향이 타올랐고 모두들 양손을 가지런히 했다. 영정 속의 할머니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따듯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등골 전체로 번지는 전율은 할아버지가 앞으로 나가 영정 앞에 절을 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향 위로 술을 돌리고 들어온 다음 아버지가 나가 절을 했고 단체로 절을 했다. 아버지가 들어오자 나는 제사상을 향해 무심코 발을 내디뎠다. 그때 작은아버지도 함께 발을 내디뎠다. 내 차례가 아닌가. 작은아버지 차롄가. 순간 헷갈렸다. 작은아버지와 나는 서로 눈치를 봤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순간 멈칫거렸다. 작은아버지는 할머니의 친 아들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도박판에서 만난 내연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작은아버지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차. 나는 그제야 몇 년 전부터 나이순으로 작은아버지가 먼저 술을 올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영정 앞으로 작은아버지가 섰다. 작은아버지는 무슨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작은아버지가 꿇어앉아 잔을 들자 아버지가 다가가 술을 따랐다. 향 위로 잔을 돌리는 작은아버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사가 끝나고 거실에 상이 차려졌다. 남자들은 상에 둘러앉았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수저를 들지 않았다. 그 누구도 먼저 수저를 들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설날이라 말 안 했었는데 아무래도 이거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네, 뭘요? ……대체 왜 평소에 찾아오질 않냐. 아버지는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할아버지의 잔소리는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생일에도 오지 않았고 기념일에도 오지 않았던 상황을 들먹이며 아버지를 타박했다. 아버지는 실실 겸연쩍은 웃음만 흘렸다. 한참 후 할아버지가 말을 마치자 아버지는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텄다. 사정도 여의치 않고 게다가 빈손으로 어떻게 찾습니까. 염치도 없이. 내가 너희들한테 돈이라도 바라는 줄 아냐.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전에 얼굴이라도 자주 비쳐야 되는 거 아니냐. 어찌 그리도 모르냐. 그래도 자식 마음이 그게 아니죠. 그러면서 아버지는 나를 향해 턱짓했다. 쟤는 예전에 수업료하고 급식비 못 내줬다고 이젠 아비 취급도 안 하는데. 도대체 대화가 오간 지가 언젠지. 이놈의 돈이 뭔지. 피보다 진한 게 돈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할아버지는 옆에 앉아 있던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게 참말이냐? 돈 안 줬다고 그러는 게 세상에 어딨냐? 돈은 순간이야. 아무리 못 해줬다 해도 네 아버지 아니냐. 허 참. 명색이 종손이라는 놈이. 자고로 종손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점지해 준다더라. 그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러냐. 할아버지는 나를 살짝 밀쳤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숟가락으로 국을 떴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나물을 우물우물 씹다가 상 위에 내뱉고는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가, 나물이 왜 이래 짜냐. 간을 어떻게 했길래. 도저히 못 씹겠다. 그 소리에 숙모가 앞치마를 두른 채로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할아버지는 보란 듯이 수저를 탁 내려놓고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들어갔고 아버지는 그 모습을 힐끔 본 뒤 탕국을 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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