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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Nov 27. 2024

용서하라, 무조건

에세이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격이 참 극단적이고 저돌적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현재는 주위에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한 사람의 성격 형성은 아무래도 가정환경의 영향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의 집은 하루하루가 쑥대밭이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빚쟁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들이닥쳤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수업비는커녕 도시락을 싸가기도 힘이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대여섯 살 때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묻지마 손찌검이었다. 대인관계가 좋고 절에 자주 나갔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쩌면 허울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어머니의 학대는 흔히 방문과 창문이 굳게 닫힌 밀폐된 방 안에서 이뤄졌다. 어머니는 수시로 나의 모습에 아버지를 투영했다. 덕분에 거의 매일 강제로 끌려 들어갔고 앞뒤 사정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폭행은 십 년이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 당시에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공격성과 불안, 두려움이 사회에 나오면서 부정적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다. 오랜 기간 연락을 끊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어머니에게 맞는 꿈이나 환각에 시달렸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를 향한 원망이 커진다. 어머니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는 날이면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대체 왜 그렇게도 날 괴롭혔는지 묻고 싶다. 누군가는 그런 경험을 통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는 말하지만 오히려 이 문제가 현재 나의 상상력과 지성을 가로막고 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다. 명상에 관련된 책을 읽었고 종교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으며 여행을 다니며 거장의 예술작품들을 보고, 누군가에게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 한 고등학생이 투신자살을 했다. 동급생들로부터 수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던 어른들은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을 데려다 놓고 서로 화해를 시켰다. 그러나 발견된 학생의 유서에는 그 가해 학생들을 제발 좀 처벌을 해달라는 절박한 투의 글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그 아이는 과연 용서의 의미가 뭔지 몰랐을까.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용서라는 말로 억누르게 하거나 덮으라고 강요한다면 그게 과연 어떤 결과를 만들게 될까. 일단 피해자는 본인의 현재 상황과 억울한 내면을 누군가를 통해 이해받거나 위로받고 싶어 한다. 허나 용서를 미덕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다가 가해자를 왜 용서하지 않느냐고 은근히 나무라며 나중에는 오히려 피해자를 죄인으로까지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결국 피해자는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깊은 좌절과 함께 강요에 떠밀려 끔찍한 내면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욕구와 용서해야 한다는 신념이 충돌하면서 더욱 심각한 심리적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당장 겉으로는 진정된 듯, 그럴듯한 용서의 면모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단지 용서를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욕구를 충족시킨 결과에 불과하다. 피해자의 고통은 그대로이며 오히려 외면당한 내면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폭발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정작 용서를 외치는 국가단체나 종교들을 보면 당신들의 이데올로기와 교리로 갈라져있고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다. 화해와 용서라는 말은 넘치고 넘쳐나지만 세상의 갈등은 끝이 없어 보인다. 용서는 결국 사람들이 만족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하나의 이상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용서를 말하기에 앞서 당사자의 현재 상태에 대한 자각, 그리고 그 욕구 메커니즘에 대한 부단한 통찰과 진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용서라는 이름의 또 다른 공격이 감행되고 있는 현실은 분명히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용서하려는 어머니의 노력이 결국 나로서 실패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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