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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Nov 30. 2024

바다로 가는 강 (1)

단편소설



입구 푯말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야영장 안으로 걸음을 떼자 남쪽 바다를 향해 늘어서 있는 울창한 솔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석은 그 자리에 선 채로 펼쳐진 수평선을 보았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숨을 한번 들이키던 그 순간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직속 상사인 부장의 메시지였다. 부장은 결재문서에 첨부할 엑셀 자료를 어디에 뒀는지 물었다. 금주는 월 말 정산 기간이었으므로 처리해야 할 사안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부장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으나 아무려나 며칠 전 현석의 간곡한 요청에 마지못해 휴가를 허락했던 그이기도 했다. 보험사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만 받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급히 휴가를 낼 일은 없었을 텐데, 현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부장의 메시지를 보다가 전원을 종료했다. 지근거리에 있는 커다란 솔나무 앞으로 다가설 때 발끝에 뭔가 채였다. 아래를 보니 땅바닥에 뭔가 뭉툭한 게 튀어나와 있었다. 발로 흙을 걷어내자 알루미늄 텐트 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했지만 아직까지 못이 박혀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일단 이 못이 그때의 그 못이 맞는지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다. 현석은 몸을 수그리고는 손에 힘을 주며 못을 뽑아냈다.

야영장 밖을 걸어 나오자 전방으로 드넓은 논과 강이 펼쳐졌다. 강은 동쪽 갈대숲에서부터 뻗어 나와 논을 지나 드넓은 바다를 향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현석은 저 멀리 강과 바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모래사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에 다다랐을 때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돌연 반대편 강 쪽을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강 한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갯바위는 예상대로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모래사장에 신발을 벗어 놓고 물속으로 들어가 한동안 갯바위 틈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바위게나 갯지렁이, 갯강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여기가 강물이라고는 하지만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바다생물들이 흔치않게 서식하고 있을 터였다. 그 당시에는 물에 발만 담그고 있더라도 바위틈에서 움찔거리는 게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고 소라고둥과 어린 참소라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현석은 건너편의 다른 갯바위를 향해 나아갔다. 그쪽은 정황상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아마도 강이 끝나는 지점인 듯했다. 흙으로 다져놓은 양쪽 제방 곳곳이 토사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나무뿌리들이 튀어나와 어지러이 뒤엉켜 있었다. 흡사 산사태로 붕괴된 도로변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서 돌아본, 여태 지나쳐왔던 제방도 여기만큼 심각한 건 아니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분 나쁜 악취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현석은 물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냄새인 걸 알아채고 코를 막은 채 밖으로 나왔다.


현석은 모래사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다가 일부러 바닥에 미끄러지며 뒹굴었다. 한동안 누운 채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시 일어나 모래사장을 걷다가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등지고 섰다. 누군가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것 마냥 포즈를 잡고 혼자서 미소를 지었다. 자갈을 주워 밀려드는 파도를 향해 힘껏 던졌다. 잠시 뒤 물수제비를 할 요량으로 얇고 둥근 자갈들을 골라서 바다를 향해 몇 번이고 던져댔다. 자갈은 물 위를 두 번 정도 튕겨 오르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현석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자갈을 던졌다. 마치 누군가와 바로 옆에서 같이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잠깐 주춤하면서 배를 잡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잠시 뒤 다시 몸을 추스르고는 자갈을 살펴보았다. 쥐고 있는 자갈의 표면은 뭉툭하고 울퉁불퉁했다. 지금까지 집어던졌던 매끈하고 평평한 자갈과는 생김새가 사뭇 달랐다. 요목조목 모양새가 어쩐지 누군가의 얼굴을 생각나게 했다. 현석은 순간 눈을 감았다. 현석의 콤플렉스는 자신의 얼굴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현석을 향해 아버지와 닮았다고 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곤 했다. 아버지와 대화를 해본 지는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다. 현석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해봤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한 번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는 데다가 그 사람의 얼굴을 다시 기억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했다.

처음 집으로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친 건 현석이 중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변변한 직업이 없던 아버지의 성격은 상당히 가부장적이었다. 다혈질적이었던 아버지는 집안에서 결코 손에 물 한 번 묻히는 법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어머니와 겸상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설 때마다 현석과 어머니로부터 깍듯한 인사로 현관 앞까지 배웅을 받아야 했다. 그런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였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어왔는데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에게서 돈과 통장, 신용카드를 뺏다시피 해서 나갔다. 나중에 도박으로 인한 빚더미가 어머니의 명의로 그대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 역시 여느 때처럼 아무 일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들이닥치는 빚쟁이들을 더는 감당할 수 없던 현석은 호프집에서 일하면서 첫 월급을 받아 고시원에 들어갈 때까지 지하철역 앞이나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눈을 붙였다. 집은 물론이고 학교로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허구한 날 수업료 내기를 종용하는 서무실 직원과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고 자신을 거지처럼 보는 반 아이들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합격한 후 간간이 연락하는 어머니를 통해 집안 사정이나 아버지의 근황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못난 남편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나중에 늙어서 의지할 곳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 곧 정신을 차릴 거고 당신도 노력할 거라는 어머니의 말에 현석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도 이제는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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