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먹어버린 고백

by 윤유은

원하는 대학이 어디냐는 질문보다 원치 않는 대학이 어디냐는 질문에 더 명확하게 답할 수 있었던 고3 시절. 여대는 내 선택지에 전혀 없었다.


여중 여고에 입학해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성비 시스템에 갇혀 6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세상 밖은 남녀가 섞여 상호작용하는데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사회는 구성에서부터 파생된 왜곡된 것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녀가 고루 섞인 환경에서 다양성을 경험해보며 대학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컸다. 이러한 강한 의지로 20살, 남녀공학인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3월 입학 시즌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4월 봄이 되면서 교정에 벚꽃이 흐드러졌다. 분홍 물결에 향기로운 꽃내음 가득한 교정은 20대 청춘들의 마음을 간질이며 사랑을 시작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 이후로는 비자발적으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집, 학교, 독서실만 쳇바퀴 돌던 삶이었다. 20살이 되면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주듯 남자친구가 자연스럽게 생길 줄 알았다. 봄이 살랑살랑 마음을 어지럽히고 주변은 하나둘 커플이 성사돼 가는데 나만 혼자인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던 중, 새내기 MT를 가게 됐고 술 게임 벌칙에 걸려 같이 지목당한 한 학번 남자 선배와 러브샷을 하게 됐다. 친분이 없었던 남자 선배는 웃으면서 러브샷에 기꺼이 응해주었고 잠깐이었지만 스쳐 지나간 그 미소에 새내기의 마음이 흔들렸다. 말랑말랑했던 마음에 봄의 종소리가 들리는 순간이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으나 나를 향한 미소 한 번으로 선배는 한순간에 그냥 선배에서 좋은 남자로 인식되었다. 그 후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호감이 가기 시작한 선배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접점이 없었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다가 문득 결심을 했다. 4월 1일 만우절을 핑계 삼아서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고백부터 해보기로.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감정 교감 없이 고백부터 한다는 것은 거절당하기 십상인 시나리오지만 20살의 패기로 대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작정했던 것 같다. 그런데 스스로도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확신이 안 섰기에 누군가의 격려가 필요했다. 그래서 고백하기 전날, 나보다 한 살 많았던 동기 언니에게 나의 이 멋들어진 계획을 털어놓으며 사전점검을 받았다. 그 언니는 처음엔 나의 대담한 계획을 듣고 놀랐으나 이내 너무 용기 있다며 행운을 빈다고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대망의 다음날인 4월 1일이 되었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그날 내 고백을 들어야 할 선배가 이미 누군가의 남자친구가 돼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도 그 여자친구란 존재는 그 전날 내가 용기 내 고민을 나누던 동기 언니였다. 상황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믿기지가 않았고 정신이 아득했다. 고백도 제대로 못해보고 끝났다는 슬픔보다 동기 언니에 대한 배신감으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친구에게 그 커플이 사귄 지 얼마나 된 거냐고 물었을 때 ‘어제부터 사귀었다고 한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역설적으로 동기언니는 내 고백을 듣고 동기부여를 받아 나보다 먼저 선배에게 고백을 한 것이었다. 아마도 동기언니 또한 그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나만 순진했을까 하는 물음만 계속 되뇌며 몽롱한 정신상태로 그날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커플은 몇 개월 못가 헤어졌지만 내가 받았던 정신적인 충격과 배신감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전에 접어야만 했던 짝사랑. 처음엔 사과 한마디 없었던 동기언니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하지만 곧 여름이 되면서 나에게도 남자친구가 생겨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에 대한 마음이 커지는 것과 반비례해 원망의 마음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고 새내기 시절 쓰라렸던 봄의 추억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작은 사건사고로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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