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했었는데 조금 전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도 가물가물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요즘이다. 더욱이 20살 이전의 기억들은 사건사고, 감정의 고리들이 헐겁게 연결되어 뇌리에 자리해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 시절 선명한 기억들은 여전히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고 뜨겁다.
‘언니 나랑 같이 학교 가자.’
‘싫어. 나는 친구랑 갈 거야.’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던 2살 터울 친언니에게 등교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고 언니는 매몰차게 거절했었다. 학창시절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다닌 기간이 겹쳤던 4년의 시간 동안 언니와 함께 등교를 했던 기억이 없다.
보통의 자매들은 사소한 일까지 공유하고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눈다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같은 공간 한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자랐지만 수저가 밥그릇에 부딪히는 소리처럼 서로에게 차가웠고 서로 잘 몰랐다. 성인이 된 지금도 먼 친척이 가끔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이로 지내고 있다.
어렸을 때는 형제자매보다 친구의 존재가 더 크고 소중했을 수 있다. 하지만 점차 성인이 되어 가면서 친구와의 관계는 고무줄과 같이 한쪽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겨도 반대쪽에서 놔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애정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 수는 있어도 영원의 관계로 묶이는 형제자매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언니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든 시기도 나중의 일이었다.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우리 자매는 왜 이렇게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는지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았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우리는 학습능력에 따라 다르게 대우받았다. 어느 집은 큰애를 우선해서 챙기는가 하면 또 어느 집은 막내를 우선으로 챙기는 집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성과주의 집안이었다.
남아선호 사상이 뚜렷했던 90년대 삼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나 태생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탓인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에 기민하게 반응했고 눈치가 빨랐다. 부모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초등학생 때부터 우등생으로서 부모님의 위신을 세워드렸고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다. 반면 언니는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 또한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과는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했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자녀를 존재 자체로 존중해주기보다 본인이 만든 목적 달성에 어느 정도 부합했는가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하셨다. 부모님께서는 늘 한 공간에 우리 삼남매를 모아놓고 언니의 자존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언니한테 공부 잘하는 법 좀 네가 가르쳐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공부를 잘했던 나는 당연히 집안일에서 제외되거나 비교적 쉬운 것만 맡았던 적이 많았고 언니에겐 많은 집안일이 할당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공부를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은 더 강화되었지만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언니를 은연중에 무시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언니 입장에서 여동생은 참 얄미운 존재였을 것이다. 자아정체성이 성립되는 중요한 시기에 피할 수도 없는 존재인 동생과 지속적으로 비교당하며 자란다는 것은 지옥과도 같았을 것이다.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분야의 성장 가능성조차 무시당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버린 기분이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성과에 따라 다른 관심과 애정의 크기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자매로서 인생의 동반자, 챙겨주고 보듬어줘야 할 존재가 아닌 ‘경쟁자’로 서로를 인식하며 커왔다. 이렇게 지내온 세월이 길었기 때문에 성인이 돼서도 쉽게 친밀한 관계로 넘어가기 힘들었다.
가족 울타리 안에서 언니를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어 점차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언니를 보기 시작하면서 참 좋은 사람이며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참 서글프고 서럽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부모 밑에서 자매로 태어났다면, 사회에서 만난 인연이었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관계이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이렇게 만나야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