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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MIND Mar 21. 2022

이 밤이 외로워서, 미움 받아볼꺼야

외로움, 담배만큼 진한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심리학 책이 한창 유행한 2010년대, 사람들이 한 번씩은 들어본 책에 쓰여 있는 글귀이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일본 심리학자인 기시미 이치히로가 쓴 책.


‘미움 받을 용기’


 지금 날 머리 아프게 만드는 고민들만 생각해봐도 대게 그렇다. 연애나 결혼이나 친구관계나, 우리가 항상 마음 속 구석에 있는 문제는 인간관계와 관련되어 있었다.



<외롭기 싫은데, 미움 받기도 싫어>


 책에선 인간은 남에게 미움 받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이 크고, 그 마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이자 본능적 욕망에서 비롯되어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당연히 외롭고 싶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기고 삐뚤어진 자유를 추구한다. 열등감을 느끼고, 고집을 피우고 뒷담화를 한다. 같이 지내야 할 사람과 평생 등을 지는 게 부지기수다. 혹은 겉으로 잘 지내지만, 속은 남들이 주는 스트레스에 망가진다. 이런 소속과 자유 둘 간의 모순 속에서 우린 자신을 망가뜨린다.


 책 ‘미움 받을 용기’는 이렇게 사회적 욕망인 소속감이 본능적인 것이라 전제하고, ‘소속감’과 ‘타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 간의 충돌을 해결할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에 다다라 ‘우린 공동체에서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자립해 자신만의 행복을 키울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자연인으로 살면 되지 않나?>


 그러나 전제부터 이해하기 어렵다. ‘소속감’이 우리에게 본능적인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딘가 소속되어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 그냥 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홀로 지낸다면 다 해결될 일 아닌가? 마치 자연인이 되길 선택한 사람처럼, 자연 속에서 홀로 거닐면 고민이 끝나는 거 아닌가라는 근본적 의문이 든다.



<Loneliness> - explained by Kurzgesagt


 ‘우리의 외로움과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적인가?’


이 질문에 독일의 교육 유튜브 채널 ‘Kurzgesagt : In a nutshell(이하 쿠르츠게작트)’가 아주 명료하게 답을 했다. 그 대답은 ‘yes’이다. 지금부터 하는 외로움에 대한 설명은 채널 쿠르츠게작트의 영상 “Loneliness”에 근거하고 있다.


부, 명예, 권력, 미, 사회성, 인품 그 어떤 것도 외로움을 막아내지 못한다. 외로움은 우리의 생물학적 일부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배고픔과 마찬가지로 몸의 기능이라고 한다. 배고픔이 신체적 필요에 집중하도록 하듯이, 외로움은 사회적 필요에 집중하도록 한다. 


 우리의 몸이 사회적 필요에 집중하도록 설계된 이유는, 수백만 년 전부터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 결과, 우리 조상들이 협동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도록 되었다.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고, 안전하고 따뜻하게 머무는 것이 고대 사회엔 혼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함께 있는다는 것은 생존한다는 것이고,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게 사회적 협동력이 강한 조상들이 생존해 남았고, 그렇게 인류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도록 진화했다. 그렇게 사회적 관계를 지키는 것의 우리의 뇌 속에 필수요소로 자리잡았다.


 어떤 행동으로 모임에게 배제 당했을 때, 그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은 배제 당한 행동을 고칠 가능성이 높고 다시 모임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해 부족에서 쫓겨났을 때, 외로움을 못 느낀 사람은 홀로 서리 맞으며 죽었겠지만, 외로움을 격렬히 느낀 사람은 즉각 사과를 하며 부족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린 외로움을 더욱 느끼도록 진화했다. 마치 뜨거운 불에 닿았을 때 곧바로 손을 빼듯이, 홀로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외로움, 담배만큼 몸에 안좋은> - explained by Kurzgesagt


 그렇다면 우리가 외로움을 생물학적으로 느낀다고 해도, 지금 세상이 혼자 산다고 위험한 세상은 아니지 않는가? 혼자 있는다고 굶는 것도 아니고, 짐승의 습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외로울 순 있어도, 그게 우리 몸에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외로움은 그 자체만으로도 몸에 매우 해롭다. 만성적 외로움은 노화를 촉진하고, 치매와 암을 악화시키며, 면역력을 떨어뜨린다. 비만의 2배만큼, 그리고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는 만큼 외로움은 우리 몸에 큰 악영향을 준다. 더군다나 외로움은 스스로 더 큰 외로움을 불러온다. 외로움도 신체 내 전기신호와 같아서, 신호가 뇌에 닿으면 곧바로 작용이 일어난다. 그 작용이 바로 ‘방어기제’이다. 만성적 외로움에 시달린 뇌는 방어기제를 통해 혼자가 되더라도 남들에게서 살아남고자 한다. 그래서 남들의 사회적 신호에 더 예민한 상태가 되고, 남들의 아무 의미 없는 표정을 적대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남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다 보니 더욱 고립되어간다. 이 외로움의 악순환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결국 몸과 마음을 다 다치게 된다.



<외로움을 떨쳐낼 수 없는 우리>


 쿠르츠게작트의 설명을 통해, 외로움이 배고픔과 같이 우리의 몸과 뇌에서 떨쳐낼 수 없는 고통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린 항상 누구와 연결되고 싶어하고,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고 우리의 건강한 삶에 꼭 필요한 ‘욕심’이다. 문제는 이 외로움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직업을 찾기 위해 기존의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고 먼 도시로 떠난다. 그 곳의 열악한 환경 속에 홀로 남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개인주의를 설파하며 개인의 자유보장을 우선시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작은 가정을 이뤘다. 이후 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하며 사람들을 직접 안보고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만, 우리 몸은 석기시대 사람과 마찬가지로 외로움을 똑같이 느끼기에, 직접 마주하지 못해 느끼는 외로움은 점차 커진다.


 우린 이 커져가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건강한 방법으로 다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지를 고민해야 하고, 그 방법을 알프레드 아들러가 제시했다.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아들러는 행복을 ‘공헌감’이라고 정의한다. 다른 사람, 혹은 사회에 자신이 도움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이 공동체에 속함을 느끼며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고서, 멋대로 생각해 자신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공헌감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다시 고립을 자초할 것이고, 행복이 아닌 고통과 분노만이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


 그래서 아들러는 올바른 공헌감을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 자신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한다. 건강한 마음가짐과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공헌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환의 3요소를 제시한다.


 먼저, ‘자기수용’ 이다. 긍정적 포기라고도 하는데, 자신에게 있어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긍정적 포기를 못하기에, 남들의 장점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무력감을 갖게 된다. 이 무력감은 남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억누른다. 또 무력감에 변할 수 있는 것을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지금의 외로움에 머물러 고립된다. 그래서 자기수용이 중요한 것이다. 남들과 자신을 명확히 구분하고, 내가 앞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을 알고 긍정적 변화를 차근차근 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건강한 마음가짐을 갖추게 되고, 남을 도울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타자신뢰를 해야 한다. 남이 나에게 배신을 할 것이란 의심은 우리가 남을 돕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의심하는 모습이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도 보여, 타인의 의심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돌릴 때, 그 사람에게 절대적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나중에 상처 입어도 좋다. 상처 입고, 충분히 아파하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자신의 도움에 대한 보답을 원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신뢰가 아닌 신용이다. 채무와 채권과 같은 관계가 아닌, 남들과 진정으로 통하는 관계가 되어야 그때부터 외로움을 벗어날 건강한 발걸음을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타자공헌’이다. 사람들이 건강한 마음가짐과, 타인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음에도 타자공헌을 시작하는 것을 망설인다. 누구에게 공헌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고, 또 공헌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도 헷갈리기 때문이다. 아들러는 타자공헌이 ‘주관적’이라고 설명한다. 위에서 올바른 공헌감만이 인정된다고 해놓곤, 주관적이라고 하니 헷갈릴 수 있겠다. 하지만,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위의 공헌감이라면 최소조건을 이미 갖춘 것이다. 이 위에서, 우린 어떤 공헌이라도 괜찮다. 공원의 쓰레기를 줍건, 부모님의 어깨를 주물러 드려도 좋다. 먼 나라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좋다.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현실을 공헌감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행복이고, 모두의 행복이 될 것이며 이 행복의 선순환이 외로움을 막아준다.



<외롭지 않고, 문제도 없이 우리가 잘 지내려면, 미움 받아도 이겨내자.>


 아들러의 행복에 대한 정의와 공헌감을 얻는 방법이 너무나 이상적이고, 뜬구름을 잡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치 건강하기 위해 5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고, 운동을 해야함을 알지만, 현실적으로 완벽히 이행하기 불가능하듯이, 아들러의 방법도 결국 불가능하다고 치부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긍정적 포기를 하려는 것을 막고, 타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말라고 당부할 것이고, 남을 돕는 일은 쓸모 없는 일이라 비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5대 영양소를 알고, 운동의 중요성을 안다면 조금씩 생활 속에서 몸에 좋은 것을 찾아 먹고,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접한 이후부터는, 우리의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인간관계가 밀접함을 알게 되고, 또 행복과 직결됨을 알게 된다. 그 ‘알게 됨’을 기점으로 우린 생각을 바꾸려 노력하고, 관심을 남들에게 향하며 타인을 진정으로 돕고자 하는 노력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우린 행복을 위한 첫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외롭기 싫어도, 미움 받을 용기로 남에게 집착 않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열어간다.



Artist DAN:D with Gallery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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