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나?
어른이 되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까먹기도 한다.
그럴 때는 아주 어렸을 적 모습을 기억해 보면 도움이 된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어쩌면 진짜 '나'에 가까운 모습일지 모르니까.
어린 시절의 나는 할머니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린이날 기념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거기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밝고 건강하던 모습은 아주 잠깐이었다.
가끔은 내가 나 스스로를 제한해 버리기도 한다.
'이건 돼. 이건 안 돼.'
스스로 한계선을 그어버린다. 나는 일찌감치 선을 그어 버렸고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되는 것도 굉장히 노력이 필요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진짜 꿈은 가슴에 남았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3학년 담임선생님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를 잘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은 합창부도 지도하셨고 나는 노래하는 게 좋아서 학교 가는 게 행복했다. 아침에 40분을 걸어서 가도 노래가 절로 나왔다.
중1 때, 딱 한번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친구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같은 반에 나 말고도 두 명의 친구들이 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다른 누구에게도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은 내 가슴에 묻은 나만의 꿈이다.
학창 시절의 나는 자신감이 없는 아이여서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동아리 오디션을 보면 떨어지기 일 수였다. 공부만 겨우 쫓아가기 바쁜 내가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건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꿈은 끈질기게 나를 쫓아왔다.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왔고 나는 조금씩 꿈에 가까워졌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노래가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지 알려주셨다. 선생님처럼 음악으로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그 정도의 피아노 실력이 없었다. 그래도 교직 마지막 해에 아이들이랑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중1 때는 합창부에 떨어졌지만 작곡을 배울 수 있었고, 그렇게 음악선생님에게 배운 공교육 작곡 실력으로 실기대회도 나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들어가서 활동했던 합창부도 힘들었지만 잊지 못할 추억이다.
가장 놀라운 건 21살부터 쭈욱 해 온 요가가 나의 몸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전엔 목만 돌려도 우두둑 소리가 나는 사람이었고 자세도 구부정했는데 요가가 나를 바꿔놓았다. 바른 자세로 설 수 있게 되었고 호흡을 담아 노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꿈은 '끝났다.'라고 생각했다. 뮤지컬 배우가 되지 못할 이유를 들자면 끝도 없었다.
20대 중후반에 뮤지컬 동아리에서 활동한 걸로 나의 '한'을 풀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결혼도 했고 엄마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뮤지컬은 할 수 없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뮤지컬 동아리를 쫓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래도 제주에 내려와서 당근에서 찾은 뮤지컬 모임에 두 번인가 참여했었는데. 좋은 것도 있었지만 아련하고 슬펐다. 노래를 다시 불러보는 건 너무 좋지만 뭔가 아쉬웠다.
현실적으로 마음을 접었다. 그게 맞지. 뮤지컬 배우가 되는 건 어렵겠지. 연기 노래 전공도 아니고 서른이 넘은 애 엄마인데. 이번생은 아무래도 무리지. 꿈을 이루려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사건이 일어났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한참 열심히 보고 난 뒤, 아이유가 백상 예술대상을 못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상은 '정년이'의 김태리 배우였다. 평소 김태리 배우를 좋아하다 보니 정년이가 궁금해졌다.
김태리 배우는 정년이를 찍기 위해서 3년 동안 노래를 배워 직접 불렀다. 그래서 유료 결제를 하고 정년이를 보기 시작했다.
그게 나의 꿈에도 불을 붙이고 말았다. 가슴에 있는 열정만으로 무엇이 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게 전부인 것 같다.
다음화에서는 어떻게 드라마 정년이를 보다가 뮤지컬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보겠다. ♥️
* 사진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