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분만 성공한 사람이 있긴 해요?

코로나에서 버틴 임신, 출산, 육아의 시간들

출산 후기를 보면 유도분만은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운 지인들도 진통이란 진통은 다 겪고 수술한 최악의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나올 생각이 없는 아기를 나오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유도분만을 앞두고 뜻밖에 카톡을 받았다. 밴드에서 함께 기상 모임을 하는 도현님이었다. 실제로 만난 건 결혼하기 전 부산 오프라인 모임에서 딱 한 번 만난 게 전부였다. 비록 온라인이기는 했으나 나의 아가씨 시절과 결혼, 그리고 아기 엄마가 되기까지 나를 쭉 지켜봐 온 분이기도 했다.


출산이 가까웠으니 아기 낳았냐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기막힌 타이밍에 온 연락에서 도현님은 폭풍 같은 카톡을 술술 쏟아냈다. 유도분만으로 아이 두 명을 자연분만한 내 주변의 유일의 성공사례였다. 더 놀라운 것은 출산에 걸린 진통 시간이었다.


초산에는 자궁문이 잘 안 열리고 자궁경부가 튼튼해서 10시간 이상 진통하는 경우도 흔하다. 하루를 꼴딱 세우고 30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봤기에 나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현님은 첫째가 두 시간, 둘째는 네 시간 걸렸다면서 나에게 짧고 굵게 진통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법은 아주 간단했다. 진짜 진통이 오면 가만히 아픔을 느끼고 있지 말고 진통이 올 때마다 힘을 빡 주라는 거였다. 어디에 힘을 주느냐가 중요했다.


얼굴로 시뻘겋게 힘을 주거나 소리를 질러서 목이 다 상해버리면 안 돼요. 이빨을 악물어서 이가 나가게 하지 말고, 그때마다 진짜로 큰 볼일을, 그러니까 똥을 눈다고 생각하고 힘을 주라고요. 알았죠?


그러면 정확하게 똥이 나올 것 같을 때 아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나는 카톡을 보면서 혼자 낄낄 웃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장담하는데 그 카톡이 아니었다면 나는 겁을 먹고 병원에 갔을 거고 덜덜 떨다가 수술을 해달라고 했을 것이다.




유도분만은 하루 전에 입원해서 질정제를 넣어놓고 밤을 지낸다. 남편과 짐을 바리바리 싸서 캐리어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마치 여행을 가는 것 같았는데 돌아올 때는 세 식구가 되어 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거실에는 이미 아기를 위해 준비해 놓은 물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글쎄 예전 같았으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병원에 친정엄마와 함께 들어갈 수 있었을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는 딱 한 명만 가능했으니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이 아기를 책임질 남편이어야 했다. 어른들로부터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 좋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엄마 아빠가 단둘이 헤쳐나가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우리는 입원 전에 미리 PCR 검사를 받아 음성이라고 뜬 메시지를 간호사에게 보여줬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곳이라 낯설지는 않았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간호사는 여러 가지 서류를 내 손에 쥐여주고 설명하면서 사인을 받았다.




나는 예전부터 자연주의 분만을 이상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무통 주사를 안 맞을 생각이었다. 드물긴 하지만 무통 주사를 맞고 부작용이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해서 그랬다. 내가 무통 주사를 안 맞겠다고 말하자 간호사가 기겁하며 물었다.


“아니, 그걸 왜 안 맞아요?”


간호사는 무통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서류를 들고 사인하기를 기다렸고 나는 싫다고 하면서 간호사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신랑의 전화벨이 울렸다. 나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 통화는 점점 길어졌다. 나는 서류를 들고 전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지금 사인하는데 전화하게 생겼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결국 간호사의 치열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통 주사를 안 맞겠다고 해버리고 씩씩거리며 입원실로 향했다. 교통사고 때 2주 동안 있었던 병실은 1인실이었으나 불행히도 그날 남은 자리는 4인실뿐이었다.


병실에는 나 말고 다른 3명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커튼이 쳐져 있어서 누가 안에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통로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나는 침대에 짐만 던져두고 로비에 있는 소파에 신랑과 마주 앉았다.


신랑은 죄인이 돼서 아무 말도 없었고 나는 아직도 화가 나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에 전화를 할까.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 몸에 어떤 주사를 꽂을지 곧장 연결되는 서류에 사인을 하는데 전화라니. 전화한 그 사람은 아마 자다가도 뒤통수가 따가울 거다.




이렇게 불행하게 아기를 낳으러 갈 수는 없어서 무작정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나는 할머니의 위로가 필요했다.


내 밑으로는 남동생이 두 명이나 있었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잠을 잤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 아빠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11시가 다 돼가는 밤중이었지만 할머니는 전화를 받으셨다.


할머니는 늘 그렇듯이 어리광과 칭얼대는 모든 것을 받아주셨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다섯 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서 칭얼대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조용한 병실 로비에는 우리뿐이었고 할머니의 목소리는 스피커 폰을 통해 바깥으로 울렸다.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다. 신랑이 그 시절에는 어떻게 아이를 낳았냐고 물었다.


“에휴, 그때 병원이 어디 있어. 다 집에서 낳았지. 병원 근처는 가보지도 못하고 낳았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새집을 짓기 전까지 우리가 살았던 한옥에는 가마솥이 걸린 바깥 부엌이 있었다. 겨울이면 안쪽으로 땔감을 잔뜩 쌓아 놓고 부지깽이로 쑤셔가며 아궁이에 불을 피워야 안방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할머니도 그 집에서 아이를 낳으셨을까. 나는 차마 그 시절을 상상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우리 손녀딸은 뭐든 잘 해낼 거야.”


조곤조곤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여기가 집 근처 어딘가 인 것 같이 느껴졌다. 살짝 졸음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도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언제나 잘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의심을 하다가도 ‘그럼 할 수 있지!’ 덥석 믿어 버리곤 했다. 뭐든 잘 해낼 거라고 하던 그 말이 오늘따라 더 가슴을 울렸다. 나는 진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신랑이 더는 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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