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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요가 수행자 Jun 27. 2023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맨발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심지어 맨발이어도.


오랜만에 고3 친구 두 명과 약속을 잡았다. 원주, 서울, 인천에 있으니 중간인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강남 고속터미널.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아기 엄마가 되고 나에게 약속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최대한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가 다 되면 지체 없이 집을 나선다.


집에만 있다 보니 입을 옷이 정말 없다. 지난번 다른 친구와 만나서 위 아래 한벌을 샀는데 그걸 그대로 입었다. 역시 새 옷이 좋구나 하는데 바지가 너무 길다.


신발장을 열어 굽이 높은 신발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아가씨 시절에 신던 아이보리색 통굽 하이힐 샌들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신어보니 나쁘지 않다. 발가락 앞이 트여있어서 불편하지도 않고.


좋았어. 오늘은 하이힐이다. 그렇게 힐을 신고 뚜벅뚜벅 길을 나섰다.




처음 이상을 감지했던 건 지하철 안에서였다. 오른쪽 샌들의 버클 부분이 해져있었다. 바스러졌다고 해야 하나. 손으로 만지니 우수수 가루가 부서져 나왔다. 반대쪽은 괜찮은데 왜 그러지 하고 그냥 지나쳤다.


고속터미널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9호선에서 4번 출구 쪽으로 나가기 위해 먼 길을 걸어갔다. 미세하게 오른발과 왼발의 느낌이 달랐다. 자세히 보니 바스러지던 오른쪽 샌들의 끈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끈 하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계속 걸었다.


뭐 중간에 하나 사서 신으면 되지.


그러던 중 저 쪽에 신발을 파는 가게 하나가 보였다. 몽땅 만원이라고 써붙인 노점에서는 시끄러운 노래를 틀어놓고 물건을 팔았다. 그쪽으로 가보려다가 아무래도 너무 싸구려고 디자인도 아줌마들이 신는 신발에 가까워서 그냥 지나쳤다.


또 가게가 나오겠지.


그렇게 신발가게를 지나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신발 가게는 없고 옷가게뿐이다. 옷가게 안쪽에 신발을 팔지는 않을까 살펴봤지만 신발은 없었다.


그때 발바닥에 휑한 느낌이 들었다. 붙어있던 높은 힐이 사라졌다. 내려다보니 오른쪽 신발의 밑창이 뜯어져 있었다. 통째로. 굽 높은 샌들은 신발장에서 폭삭 삭아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어쩌지. 이렇게 금방 떨어져 버릴줄 몰랐는데. 왜 그 가게에서 신발을 사지 않았던 것인가.




주저앉았다. 신발을 벗어야 했다. 신발 버클을 풀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뜨거워지고 한숨부터 나왔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헛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 노점상에서 만 원짜리 신발을 사서 신어야 했다.


오늘 약속에 나온다고 귀걸이며 목걸이도 하고 안경대신 렌즈도 끼고 화장도 했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이제 이 차림 그대로 맨발로 걸어야 한다.


사람들이 지나쳐간다. 다들 멋진 옷을 입고 괜찮은 신발을 신고 지나간다. 간신히 맨발로 바닥을 밟았다. 샌들의 처참한 모습이 드러났다. 신발을 모아 두 손에 들었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나의 가늘고 긴 발가락이여..


한 발짝을 떼기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걱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창피하고 고개를 못 들겠고. 그런데 막상 한 걸음을 옮기니 다음 걸음을 옮기는 일은 쉬웠다.


첫발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고속터미널 역 돌바닥은 깨끗이 닦여 있었고 열기 때문에 살짝 따끈했다. 찜질방 대리석 바닥을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 혹시 누가 맨발로 걸어가는 걸 알아채지 않았을까.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는 내가 그들을 하나씩 쳐다봤을 때 눈 한번 마주친 사람이 없었다. 각자 바삐 갈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에스컬레이터까지 걸어왔을 때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자유로운 기분마저 느꼈다.


크로아티아에서 빡빡한 스케줄로 돌아다니다가 아침 버스를 놓쳤던 날. 계획이 틀어져서 막막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는 자유를 만끽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구간이 에스컬레이터였다. 세로줄의 단단한 철판으로 되어있어서 지압판 위에 올라간 느낌이 났다. 가장 더러운 구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 위의 나는 이미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도 걸어갈 수 있다!



신발 가게에 도착하자 주인 아저씨는 운동화든 슬리퍼든 몽땅 만원이라면서 오늘 문을 닫는다고 했다. 나이스 타이밍. 부러진 신발은 바닥에 내려놓고 아무 신발이나 일단 신었다. 아저씨도 아마 모르셨을 거다. 내가 맨발로 걸어온 것은.


신었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고른 슬리퍼. 굽이 낮지만 발이 편한 신발. 오트밀색 바지에 잘 어울리는 아이보리이다. 만원을 핸드폰으로 계좌이체하고 부러진 신발은 친절한 아저씨가 버리고 가라고 말해준 곳에 놓았다.


슬리퍼를 신고 걸어본다. 바지가 길어서 질질 바닥에 끌린다.


하지만 이제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안다. 바지가 길어서 계단을 올라갈 때면 웨딩드레스 들듯 손으로 잡아 올려야 하지만. 맨발로도 걸어간 여자니까. 이 정도야 뭐.


 


*사진: UnsplashSarah Lee




https://m.blog.naver.com/gmj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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