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안(4)

by 황희주

왜 불안감이 드는 걸까.. 인지능력이 하나 추가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이 저주받은 능력은 내 감정 영역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쁨이 커짐과 동시에 슬픔, 우울함도 크게 다가왔다. 냄새는 솔직했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다. 글로 어떤 낌새를 느꼈을 때 '수상한 냄새', '구린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냄새는 본질을 품고 있기에 그렇다. '사람의 냄새'는 왜 이리 지독한 것인가. 사람에게 좋은 냄새가 날 수 없을까? 첫인상을 결정하는 분자(향수)가 아닌 향기로운 분자를 생성하는 모체는 없을까? 향기를 구분한 것은 객관적일까 주관적일까. 차라리 객관적이면 좋겠다. 내 생각을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으니까. 주관적이다면 향기로운 모체를 찾기가 힘들도 존재 자체도 확실하지않는 상황에서 나만의 향기를 만드는 모체를 찾아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무작위적인 흐름에 맡겨 내 주관과 상관없이 그저 우연에 의지하며 내 향기를 마주쳐야 하는 것인가? 그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이고 그때까지 나는 후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암울하지만 기대가 된다. 그 향기를 찾는 순간 무작위적인 흐름 속 당당히 선택받은 자가 되어 느껴보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취해버렸을 때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에 대한 기대는 전에 했던 질문들의 냄새를 가려버릴 듯하다. 그렇기에 나는 준비하여야 한다. 그 순간이 올 때, 짧은 순간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에 맞는 격식과 예를 갖춰 냄새를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

그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전보다 확실해졌다. 창가로 비친 모든 모습들에 대한 의미들은 전보다 선명해졌다. 모두 같거나 비슷한 본질을 품고 있지만 그들의 첫 냄새는 각기 존재감을 뽐냈다. 우리 사회는 판단을 위한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 '첫 냄새', '첫인상'이라는 미명 아래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각기 다른 내용으로 정의된다. 처음 본 사람에게 백과사전처럼 찰나의 순간 나라는 인물이 정의당한다. 그저 주관적이며 근거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생각, 가치관은 그가 살아온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첫인상은 장식과 향수에 마비된 채 받아 들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감각의 불확실성에 의지한 채, '첫인상'이 뇌에 각인된 채 살아간다.


오늘도 창 안에 비친 그의 글을 본다.

'죽음의 냄새는 왜 이리도 진할까? 죽었을 때 나는 냄새가 우리가 가졌던 것인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특정한 상황에 나는 냄새인가 궁금하다. 거리에 풀이 자라면 우리는 풀을 자른다. 그때 거리에 풍기는 냄새는 진하고 기억에 남는다. 나는 숲을 돌아다니는 이유가 자연의 냄새를 맡기 위해서인데 거리에서의 그 냄새는 같은 듯 다른 듯하다. 거리에 놔뒹구는 풀들의 사체에서 나는 냄새가 더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 나는 자연에 온 듯하다. '이게 풀냄새지'라는 생각이 무심코 든다. 살아있는 것보다 죽음에서 이처럼 매혹적이게 느껴도 되는 것인가! 만약 모든 것들이 죽음의 순간 풍기는 냄새가 있다면 각기 다른 것인지 궁금하다. 내가 느끼는 '사람의 냄새'도 죽음의 순간에 기억에 남을 정도로 진하게 풍길 것인가! 그러한 냄새를 맡은 기회가 찾아왔으면! 하지만 내가 매달릴 나무는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느꼈다. 글에서 냄새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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