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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Apr 13. 2023

육아, 첫사랑처럼 아프게 말고.

육아편하게 하는법

내 첫사랑 같은, 첫아이


첫사랑의 기억은 아름답지 만은 않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라 마음 고생하며 혼자 끙끙 앓던 날들.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쓰라렸던 날들. 사랑과 집착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기도 하며 쿨하지 못해 눈물도 많이 흘렸던 날들. 요령없이 순수했던 날들.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그 사람이 기억난다기보다는 처음에 진심이었던 그 시절 내가, 그때의 내 감정이 남아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보니 그때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귀엽기도 하고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사랑이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면서 점점 힘들지 않게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내가 너무 아프지 않게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같이 있을 때 편안하고 진정으로 내가 나일 수 있는 사람과 오래도록 사랑하며 함께할 수 있게 된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엄마가 된 우리들은 아이와 또 첫사랑을 나눈다. 처음이라는 것은 설레고 특별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작은 것 하나하나 마음이 많이 쓰이고 아픔이 많다. 경험이 없고 서투른 내가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  


점점 아기 티를 벗고 할 줄 아는 게 많아지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이런 나도 엄마랍시고 해맑게 웃어주는 너를 보며 가슴이 시리고 사무치는 그런 느낌이 든다. 남들 다하는 육아인데, 죽을 것 같다고 느껴지는 나 자신이 너무 나약해 보여서 내가 비정상인가 싶기도 하고 어떨 땐 부끄럽기도 하면서 매일 진통을 겪는다. 아이가 아무리 자라나도, 첫아이는 계속 첫사랑이다. 엄마의 시행착오는 계속 이어진다.    






내 두 번째 사랑 같은, 둘째 아이


두번째 사랑부터는 나를 너무 갉아먹지도 파괴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이 가능해졌다. 적당히 편안하게, 적당히 즐기면서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데 초점이 잘 맞춰졌다.


두번째 사랑을 해보니 깨달아진다. 내 처음 사랑 진짜 사랑이 아니었음을. 내가 꿈꿔왔던 사랑이라는 걸 해보고 싶은 치기어린 마음이 앞섰음을. 내가 해보고 싶었던 그 사랑은 결국 드라마와 책, 남들의 번지르르한 이야기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 했음을. 상상 속 멋있는 사랑과 현실의 찌질한 사랑의 괴리가 나를 괴롭혔음을. 그렇게 늘 상대에게 실망하고 서운해했음을. 서로를 아프게 몰아친 사랑의 결말은 좋지않음을.


첫아이를 키우면서도 같은 생각이 든다. 아이와 나의 진짜 사랑과 관계를 생각하기 보다, 세상이 만든 기준에 맞춰진 방식대로 사랑(육아)을 하려고 한건 아닌지. 엄마의 기대와 욕심에 얼룩져 서로 힘들어지고 있는건 아닌지.





둘째를 낳아본 엄마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뭘 해도 귀여워요.” 사실 나도 그렇다. 왜 그럴까?


둘째아이  육아는 어느정도 짐작이 가면서 확실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경험도 자신도 없어 늘 불안하던 첫째와 달리 무슨 짓을 해도 ‘한참 그럴 때다~’하고 말아버린다. 문제 행동을 해도 ‘저러다가 말겠지’가 된다. 울고불고하는 것도, 온 집안을 어지르고 사고 치는 것도 별로 심각해지지 않는다. 첫째는 아무리 어려도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큰애’가 되어버리는 반면에 둘째는 마음이 편하니 아이가 커도 계속 마냥 귀여운 아기 같다.



둘째는 뱃속에서부터도 존재감이 없다. 예전엔 손꼽아 기다리던 산부인과 검진날이, 귀찮아지고 열심히 가지도 않는다. 남편이 같이 안 가도 서운하지도 않다. 태동하면 잘 있겠거니~하고 끝이다. 태명도 잘 안 불러서 가물가물 하다. 어떻게 생겼을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걱정도 안 된다. 오히려 애 낳으러 가는 날까지 엄마 없다고 찾을 첫째 아이가 더 걱정된다. 둘째 낳고도 혹여나 첫째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늘 마음이 쓰인다. 둘째는 발로 키운다는 말은 엄마가 늘 첫째 아이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신경을 많이 못써줘도 알아서 큰다는 말이다. 그러니 더 기특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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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누나한테 치여서 엄마와 시간을 별로 보내지도 못하는 아이가 애틋하다. 첫애 눈치 보느라 마음껏 안아주지도 못해 짠하다.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고플까 싶다. 그래도 특별히 뭘 더 해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냥 그게 너의 운명이겠거니 하고 만다. 아이를 동시에 두 명 키우는 것은 힘들지만, 둘째 아이를 키우는 것은 확실히 편하다.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 키우듯이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가 떠오른다. 아기 빨래 다 삶고, 순면이다 보니 건조기가 있는데도 빨래건조대에 다 널어 말렸다. 젖병소독도 늘 했다. 화장실에서는 추울까 봐 아기 욕조 두 개에 물 받아서 거실에서 매일 목욕시켰다. 남편과 노래도 불러주며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려 했다. (남들보다는 막 키우는 편이어서 "너희는 첫애를 무슨 셋째 애처럼 키우니?"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다만. 내 기준 애썼고 충분히 힘들었다.)


둘째 태어나니 모든 게 대충이다. 목욕은커녕 똥꼬만 씻기고, 노래는 커녕 뭐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후다닥 해치워 버렸다. 빨래고 젖병이고 처음부터 “그 정도로 애 안 죽는다” 마인드로 편하게 했다. 첫애는 어깨고 목이고 너무 결리고 아픈 거 꾹 참고 모유수유도 했었는데, 둘째는 조리원 퇴소하면서 바로 젖 떼고 분유로 갈아탔다. 첫아이 때는 책에 나오는 대로, 조리원에서 교육받은 대로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었는데, 이러나저러나 내 편한 대로 많은 것을 생략했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첫아이는 언제 처음 뒤집고, 언제 처음 걷고, 언제 처음 말했는지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기록도 해놨다. 늘 그날만을 기다리며 마음이 초조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언제 처음 뒤집었는지, 언제 처음 걸었는지, 언제 처음 엄마라고 말했는지 또렷하지가 않다. 엄마가 정신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아이를 보면 혼자 알아서 미션을 차곡차곡 수행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아이를 키운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게 분명하다. 반은 자기가 알아서 자라는 것이다.  



남편이랑도 “첫째 때 왜 그렇게 힘들게 했지?” 하며 한 번씩 피식 웃는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네가 하랴 내가 하랴’ 눈치 싸움하며 상대방이 쉬는 꼴 못 보고 그렇게 피 터지게 싸웠는데, 아이가 둘이 되니 ‘당신도 얼마나 힘들까’ 싶어 서로가 안쓰러워진다. ‘당신도 숨 쉴 구멍이 있어야지’ 하며 서로의 소소한 일탈을 이해하게 된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부재 시, 남은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가 헤아려진다. 부모가 되어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준다.  


둘을 낳아봐야 아는 것이라는 게 참 안타깝다. 나는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인간이라, 아니 보통보다도 좀 못난 사람이라 둘을 다 낳고 나서 이런 것들을 하나씩 깨달았다. 하나만 낳아도 안다면 당신은 정말 현명한 사람이다.





둘째를 키우면 굳이 안 해도 될 것들이 본능적으로 눈에 보인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에너지 빼지 않는다. 첫아이랑 씨름하는게 이미 힘들어서 애초에 정성 들여서 할 의지도 없다. 아이에게 애쓰지 않아도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보다 “엄마도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훨씬 앞선다. 그렇게 내려놓는다는게 조금씩 가능해진다.


대충 해도 괜찮다. 아무 일 없다.

굳이 그렇게까지 애달복달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냥 저냥 잘지내면 된거다.


이런 생각으로 첫째 아이도 키워보면 어떻까? 물론 아이가 하나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너무 애쓰지 말고, 아이를 늘 둘째 아이 키우듯이 키운다면 육아가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이다. 엄마가 꼭 힘들어야 사랑이 깊은 것은 아니다. "내 아이로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존재만으로의 사랑, 그게 제일 중요한거니까.





‘너무 아픈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아이와 엄마의 사랑도 같다.


첫사랑처럼 아프게 말고.

그냥 내 모습으로 오래오래 할 수 있는 사랑처럼.

편안하게 하는 육아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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