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회식날
나는 한잔의 커피보다 한잔의 술이 더 좋은 사람이다. 안 그래도 힘든데 피곤함을 이겨내고 더 힘내려고 마시는 커피가 싫다. 피곤하면 쉬고 잠이 오면 그냥 자고 싶다. 커피 마시면서 바닥난 에너지 땡겨쓰고 싶지 않다.
더 각성되어 심장이 뛰고 불안과 초조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 싫다. 여유를 즐기며 향과 맛을 음미하며 내가 좋아서 마시는 커피 말고, 쉬라고 말하는 뇌를 속이고 억지로 힘내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게 싫다.
대신 술은 좋다.
아이들이 하원하고 잠들기까지 대략 7시간 동안 엄마는 끊임없이 할 일에 치인다. 간식을 챙겨줘야 하고, 저녁을 준비해서 먹여야 하고, 응가처리를 해야 하고, 옷 갈아입히고 대충 씻기고 양치도 시켜야 한다. 끊임없이 놀아달라는 요구에 반응해야 하며, 툭하면 싸우는 상황도 중재해야 한다. 장난감통을 쏟아붓고 온 살림살이 널어놓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그야말로 개판이 된 집을 보는 것도 힘들고 정리하는 것도 지친다.
아이들이 흘리고 어지르고 징징거리는 것을 보며 너무 스트레스받아 한껏 날카로워진 날에는 맥주를 한 캔 깐다. 아무도 심각하지 않은데 늘 나 혼자만 산더미 같은 뒷감당에 심각해지는 느낌이다. 이대로는 아이들에게 결국 화를 낼 것 같은 예감이다. 무거움에서 벗어나고자 알코올을 마신다. 많이는 말고 딱 한 캔이면 충분하다.
몸에 힘이 살짝 빠진다. 알딸딸한 느낌이 올라오면서 오늘따라 더 버겁게 느껴졌던 살림과 육아가 별 것 아닌 듯 느껴진다. 감각이 조금 둔해지면서 예민함이 가라앉는다. 살짝 흥이 올라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은 2프로 나사 빠진 엄마를 훨씬 더 좋아한다. 엄마도 어린아이 같아져서 잔소리 대신 같이 재밌게 노는 것이 가능해진다. 괴물놀이도 더 리얼하게 잘되고, 엉덩이에 청진기를 갖다 대도 그냥 웃기다.
맥주 한 캔의 효과는 그야말로 크다. 꼭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조금 멀어지고, 몸과 마음을 릴랙스 할 수 있다. 심각한 표정의 무거운 엄마는 사라지고 부드러워진다. 아이들은 엄마의 화난 표정을 싫어한다. 한마디라도 뾰쪽한 말을 싫어한다. 그렇게 너무 힘든 날이면 술김에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웃음의 육아를 한다.
맥주 한 캔, 와인 한잔 정도의 음주는 분명 내 육아에 도움이 된다. 술김에 육아를 해보면 어른들이 노동주를 왜 마셨는지 알 수 있다. 살짝 취기가 알딸딸하게 올라오면서 힘이 불끈 솟기도 한다. 허허 웃음이 새어 나오고 나쁜 걱정들이 이내 사라진다. 내내 시달리던 잡념들이 어디 갔는지 머릿속이 가벼워진다.
실제로 적당한 술은 고통을 잊게 하고 혈액순환을 돕는데 효과가 있다. 힘든 일을 끝냈을 때, 팀원들의 사기를 진작할 때,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낯선 곳에서의 여행중일 때 등 기분을 내고 긴장을 완화해야 하는 자리에는 술이 빠지지 않는다. 육아도 그렇게 기분도 내고 긴장도 풀면 어떨까. 가끔은 술김에 말이다.
냉장고에 맥주는 늘 끊기지 않고 구비되어 있다. 마침 오늘은 남편 회식날이다. 나도 한 캔을 까고 홀로 자체 회식 중이다. 아이들은 아빠가 늦으면 귀신같이 알고 잠도 안 자고 늦게까지 놀려고 한다. 세돌, 두 돌도 안된 쪼꼬미들이 밤 12시까지 온 집안 살림 뒤엎어가며 아빠 올 때까지 버틴 적도 있다.
하필 중이염 앓이 중인 둘째와 평소 취침시간이 11시인 첫째 모두를 늦은 시간까지 혼자 케어할 생각에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어떤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르는 긴장감도 있고 혹시나 내 끝을 보게 될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나름 전시상황이다.
이런 날일수록 잘하는 날이 아니라 대충 버티는 날로 정한다. 그래야 나도 스트레스받지 않고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화를 쏟아내지 않을 수 있다. 티비도 마음껏 보여주고, 먹는 것도 시켜 먹고, 설거지 거리가 쌓이고 집이 어질러져도 내버려 두고, 최대한 편하게 나도 아이들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예전에는 회식 며칠 전 통보를 받을 때부터 짜증이 확 올라와 남편에게 내내 틱틱거렸다. 그러다 싸우기도 하고. 이제는 어차피 갈 회식 쿨하게 보내주고 좋게 한마디만 한다. “너무 늦지는 마~.”
잘하려고 너무 애쓰지만 않으면 그놈의 회식날은 오히려 조금은 특별한 날이 되기도 한다. 셀프 선물을 할 구실이 생기는 날. 남편에게 진작 요구하고 싶었으나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던 ‘결제’도 회식날을 이용해보기도 한다. 미리 바가지 긁어 남편의 빈정을 상하게 하지만 않았다면 오케이 해줄 확률이 높은 날이다.
여하튼 오늘도 술김에 육아다. 무거운 마음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고 싶은 내 방법이다. 술기운으로 조금 유연하게, 육아의 부담을 내려놓으니 아이들의 귀여움도 잘 보인다. 의무감에서 벗어나니 뭐가 그리 호기심 가득인지 이것저것 부지런히도 서랍을 내어 널어놓는 아이들이 어이가 없기도, 사랑스럽기도 하다. 흥이 올랐다가 괜히 센치해지기도 한다. 그럭저럭 흘러가는 오늘이 그리워질 것 같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는 먹는 게 최고..ㅋ
간식 먹고 밥 먹고 또 간식
빌런들… 남은 시간도 무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