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기준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 재미도 있고 내가 조금 더 풍성해지는 기분이 든다. 지식이 더해지면 괜히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만 먹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공부를 통한 지식과 지혜 쌓기는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거나 ‘배움에는 때가 없다’라는 말처럼. 그렇게 배움은 득만 있는 줄 알았다. 배움의 실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배움은 그동안 나에게 진리같은 것이었다. 부족한 나를 채워주는 도구로 말이다.
노자를 만나고 또 다른 관점을 보게 되었다. 노자는 배움의 허점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배우지 말라고 한다. 앎을 늘려가지 말라고 한다. 노자에 의하면 알면 알수록 문제가 늘어나고 욕심이 많아진다. 많이 알수록 하는 일은 더 많아지는데 근심도 같이 많아진다.
생각해 보면 해도해도 끝이없는 우리의 고달픈 삶과 육아가 딱 그 꼴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엄마 좋을대로 하는 '무위육아'를 위해서는 배움의 양면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자의 철학을 잘 풀이하는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노자의 "배우지 말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EBS인문학 특강- 현대철학자 노자 - 최진석 교수편 참고)
1. 배움은 다른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모범적 이론체계를 따라해보는 것으로 창조적 활동에 반한다.
'학습'이라는 모방과 반복된 훈련의 과정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는 창조성과 개방성은 줄어들게 된다. 통찰력, 자기만의 감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존재하지 않고 '나'로 존재해야 한다. 자발성 속에서 삶을 향유해야한다.
2. 배움에 의해 강한신념, 이념, 가치관, 지적체계가 형성되면 스스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가치체계를 줄이고 약화시켜서 자신을 무한한 개방성 속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믿고 있는 것이 흔들릴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축복이다. 불안과 모호함은 분명히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개방성을 감당하는 힘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집단적 인간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되는 것, 자신의 힘으로 얻은 생각이 중요하다.
3.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이념이 바로 보편적 기준이며, 이는 폭력적이다.
기준은 억지로 만들어진 개념적 구조일 일뿐이다. 한쪽에 서는 순간 자발성 자율성은 유린된다. 기준이 구분된다는 것은 차등이 매겨진다는 것이고 보편적 기준은 권력이 된다. 권력은 결국 폭력이 된다. 합의된 기준이 폭력을 만든다. 선으로 합의된 것을 이상적인 기준으로 삼으면 폭력을 잉태한다. 기준은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생산돼야 한다.
4. 배움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기준을 만들어 자기반성을 일삼게 한다.
반성은 이미 만들어진 기준을 진리화 하여 자신을 평가하는 일이다. 배울 수록 이상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죄인, 결함있는 존재, 천한존재로 만들게 된다. 우리에게는 더이상 반성이 아닌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 무한사랑이 더욱 필요하다.
5. 동양인들의 마음에는 맞는 정답이 언제나 존재하고, 이는 책이나 권위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새겨져 있다.
타임지에 아시아 사람들은 생각할 줄 모른다고 실린적이 있다. 뿌리깊은 유교사상과 공자의 영향일 수 있다. 정답을 찾거나 학습된 것을 대답하는 인간이 아닌 질문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세계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배움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인 활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사인 나도 한번씩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자괴감을 느낄때가 있다. 오지선다형. OMR카드에 정답을 찾아 점을 찍는일. 아이들의 성적을 매겨 등급으로 서열화하는 일. 주입식으로 어떤 지식을 가르치는 일. 왜요? 왜그래야 되는데요? 라고 하면 예의없는 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 질문이 반항이 되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 살짝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일.
교육열은 불타오르고, 배움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붓고, 뛰어놀아야 하는 아이들을 닭장에 가두어 종일 공부하게 하는데도. 그렇게 많이 배워도 인간다운 생각을 하는 힘은 키우지 못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현실. 나이가 들수록 더 현명해지고 지혜로워지는게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말이 안통하는 답답한 꼰대가 버리는 슬픈일. 학습된 확고한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개방성, 창조성, 자발성을 강조하는 노자의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전글에서 얘기한 <개별적인 육아>도 보편적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였다. 이 보편적 기준이 어디서 발생하는가에 대한 것이 바로 지금의 글이 되는 셈이다. 배움과 학습이 바로 보편적 기준을 형성하니 '많이 아는 것'에 대한 신뢰나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육아에 있어서 배움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일까?
닿을 수 없는 어떤 기준이 엄마의 머릿속에 강하게 형성되어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는 점이다.
1. 이론적으로 일이 흘러가지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버리고 불안해진다.
2. 엄마는 아이에 대해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기준이 생겨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3. 엄마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자기자신을 반성하고 폄하하게 되며 육아가 늘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4. 육아를 하면서 권위자가 말하는 이래야 한다거나 이래야 좋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행하며 피곤해진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실재를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책이나 어떤 지식은 ‘정석’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무수한 변수가 따르는 삶과 육아는 결코 정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정해진 길도 답도 없으며 모두 다르게 흘러간다.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은 분명 없는데도 정답 찾기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뒤쳐지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육아정보에 대해 눈과 귀는 항상 열려있다. 아이를 떼놓고 자유부인으로 나온 엄마들끼리 해방감을 만끽하며 결국은 아이들 이야기로 꽃을 피우듯, 아이키우기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끝도 없이 들어간다. 그러나 노자가 앎을 늘리지 말라고 말한대로, 그렇게 열심히 습득한 지식들이 꼭 도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지식을 늘리는 것은 도움을 얻으려는 내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 갈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나를 갉아먹으면서 말이다.
전문가, 베테랑, 어떠한 바이블들이 있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일반적인 우리의 육아는 계속 모자란 점이 부각당한다. 육아 전문가나 유명 육아서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결국 내 자신이 잘하고 있음에도 초라해지게 된다. 육아베테랑의 말을 듣다보면 결국 그 사람들이 우위에 있고, 나는 형편없는 엄마가 되버린다.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잘난 사람들의 것들이 보여지면 나머지 사람들은 못난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모든 화살은 엄마에게 돌아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부족한 엄마라서 그렇게 했고 화낸 것이 아니라, 그 누가 했어도 어쩔수 없고 화낼 상황이었음에도.
배움은 반성을 만든다. 반성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발버둥 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보편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나를 폄하하는 일이기도 하다.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지식 앞에서 사람은 자신을 부족하게 평가하게 된다. 아이에게는 자기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엄마 스스로는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배움과 보편적 지식이라는 것은 진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끊임없이 행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실세계에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이 괴롭다. 보통 엄마들은 충분히 잘하고 있음에도 외부로 그 업적이 드러나지 않을 뿐인데 말이다.
전문가. 권위자.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보통의 사람들은 못난 사람으로 서열화 되어 일말의 희생을 하는 셈이다. 보여지는 육아베테랑들 앞에서 나머지 엄마들은 자기 학대, 마음 고생을 하며 순수한 육아의 기쁨을 잃게 된다. 육아 지식을 많이 알수록 욕심스러운 기준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해야만 좋을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행하는 엄마도 피곤하다. 그것은 나에게도 폭력적이지만 아이에게도 폭력이 된다. 앞서가는 내 마음과 달리 아이는 내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할 리가 없으니 충돌이 생기고 관계가 틀어진다.
육아서와 육아 전문가들은 ‘이렇게 키워야한다’, ‘이런 엄마가 되어야한다’라는 틀을 만들고 엄마와 아이에게 어떤 굴레를 씌워 몸과 마음이 지치게 한다. 알면 알수록 잘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기준만 높아진다. 현재의 육아는 너무 많은 간섭이 있다. 내 육아가 외부로부터 간섭받으면 나도 아이의 인생을 간섭하게 된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과 아이를 들볶고 자꾸 일을 벌린다.
우리는 방법론적인 지식만을 끝없이 찾아 헤매는 경향이 있다. 배움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지만 분명 양면성이 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엄마가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서이지 않을까. 외부적 기준이 엄마 마음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어서 아이도 나도 힘든건 아닐까. 배우지 말라는 노자의 철학을 통해 오늘도 내 육아는 조금 더 ‘무위’에 가까워진다. 배우지말라는걸 배웠으니 한편으로는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진정 원하는 편안한 육아에 한발 다가가지는 기분이다.
타인으로부터오는 깨달음이나 지혜는 생명이 짧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글귀를 보더라도 읽는 그 순간 끄덕이고 내 내면 깊숙히 잘 남아 있지는 않는다. 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괴리가 있는 까닭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각, 영감, 직관들은 생명이 길다. 진정한 내것이니까. 누군가의 강의를 듣고 책 한줄 더 읽으며 배우는 것과 샤워를 하면서 떠오르는 나의 생각과 마음에 집중하는것. 둘중에 하나를 궂이 꼽자면 나는 후자쪽이 더 도움되리라 생각한다.
지식을 통해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고 더 성숙하게 살 수 있는가? 아니, 인간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결코 일치하지 않기에 그렇지 않다. 인풋이 늘어간다고 아웃풋이 꼭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꼭 행복한 삶이나 인격적으로 성숙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분명 많이 아는것과 행하는 것에는 괴리가 있다.
배움의 진정한 목적은 내 삶의 답을 외부에서 찾거나 누군가의 성공한 삶을 따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배움은 내 경험에서 우러나왔을 때, 또는 삶에 녹여낼 수 있을 때 빛을 발하는 것이다. 내 안에 떠다니지만 내가 날카롭게 캐치하지 못한 것을 배움으로 끄집어 낼 때 빛을 발하는 것이다.
자라날 아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엄마이다. 그렇기에 가정의 중심, 세상의 중심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이다. 엄마가 학습된 신념이나 기준, 가치관으로부터 가장 먼저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