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적인 육아
내 마음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행하는 나의 육아법을 노자의 '무위자연'철학에 근거를 두고 '무위육아‘로 명명하기로 했다. <이전글참고>
그런 무위육아는 다분히 개별적인 육아이기도 하다.
노자는 보편적 이념보다는 개별적 존재들의 자율적 자정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며, 보편적 가치가 선이라고 믿는 세상 속에서 개별적인 가치가 먼저라고 말한다.
내 삶을 보편적 가치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면 괴로움을 겪기 마련이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보편적인 육아로 많은 엄마들이 고통받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개별적인 육아가 필요하다.
모두가 하는대로 하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 답을 밖에서 찾는 것은 보편적인 육아다. 보편적인 육아를 하는 엄마는 이미 자기 머리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익숙한 개념을 그저 답습하는것 뿐이다. 그런 육아는 어떤 이론적이고 외부적인 기준에 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끝없이 부족하게 보게된다. 또한 자신의 내면에 귀기울이지 않기에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 보편적 기준에 강요되어 역할로의 엄마에 치중하게 되면 때때로 자신이 게으르고 무력한 엄마, 나약한 엄마로 느껴지기도한다. 내 모든 일상이 아이를 위주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자책을 일삼게 된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져 진정한 ‘나’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엄마라는 보편적 이념이 강요되면 엄마 자신에게 고유하게 존재하는 자발성, 자율성, 잠재력을 잃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꾸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자신의 욕구 충족 뿐만 아니라 엄마가 육아의 개별적인 주체가 되고 있는지도 살펴봐야한다. 힘든 육아를 하면서도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해야 진정한 보람을 맛볼 수 있다. 진정한 보람은 해야하는걸 했다는 안도감, 미션완료의 후련함 정도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나라는 인간이 어떤쪽으로 더 괜찮게 나아지는지 내면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다.
그동안 구조화된 이념으로서의 육아를 수행하려고만 했지 육아의 주체인 엄마 자신의 해방은 하지 않았다. 갇혀있던 ‘엄마’라는 틀을 깨보자.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내 존재에 대한 개별적 가치를 자각하고 스스로 높이 평가하자. 그래야 육아도 소신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아이도 개별적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개인적인 성향과 취향이 반영된 나만의 개별적인 육아는 어떤것일까. 나의 개별적인 육아는 무위육아다. 무위육아가 개별적인 육아임과 동시에 내 개별적인 육아가 무위육아인 것이다. 작은것에 요동치지 않고 조금 무심하게. 일일이 신경쓰지 않고 조금 내버려두고. 전체적으로 괜찮다면 별일 있어도 조금 덜 심각하게. 내키지 않는것은 쿨하게 넘기고. 아이를 키워도 내 하고 싶은거 하면서. 딱 하나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은 맛있는 밥도, 좋은 옷도, 문화적 혜택 제공도, 대단한 교육도 아닌 소박하게 자연과 함께하는 삶.
무위육아라고 하니 무언가 유유자적 허허실실 신선처럼 육아하는 엄마의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겠다. 나도 내가 생각하는대로, 글쓰는대로 현실에서 늘 실현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행복 전도사라고 해서 항상 행복한 인간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위육아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고 나의 육아철학이며 늘 되새기고 싶은 나의 다짐인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내내 시달리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편한육아를 지향하는 내 간절한 마음이다.
한시도 엄마를 가만 두지 못하고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요구하는 첫째아이와 끊임없이 어지르고 드러눕는 둘째아이와 함께하는 것이 솔직히 많은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동안 돌봄노동의 기본값을 넘어 훨씬 더 괴로웠던 이유는 내가 중요시하는 가치가 아닌 것들까지 모두 신경쓰며 나를 별로인 엄마로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다. 무위육아는 그런부분에서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내 바람이다.
아이를 낳은 사람 모두가 육아를 하고있지만, 각각 다 다른 개별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개별적인 육아는 이미 남들이 해왔던 것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내 방식대로 경험하고 깨달아 가는 것이다. 육아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고 아이를 키워가는 일들을 편견 없이 직접 마주해보자. 그 과정에서 내 모든 감정과 배움은 고스란히 내것이 되며 한계가 없다.
개별적인 육아가 결코 부족한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방식에 대해 ‘아이가 나때문에 잘못되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다. 내 방식대로 한다는 것이 방탕하고 무책임하게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엄마 마음대로 육아를 하라고 해서 망나니처럼 육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뜻한 사랑을 주고 싶은 것이 이미 엄마의 자연스러운 마음이기 때문이다. 물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흐르는 것 처럼 마음에서 우러나 하지 않을 수 없어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노자가 말하는 무위다. 보편적인 육아를 따르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각자 나름대로 괜찮은 육아를 할 수 있다.
엄마가 되더라도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미루지 않는 것이 훨씬 진실성 있다. 내키지 않는 괜한 희생하며 열받지 말고 개별적인 육아를 통해 나를 중요시하자. 아이를 잘 키우려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억지 노력을 하거나 남들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발버둥친다면 육아는 위선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좋다라고 하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합의된 기준에 의해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구분될 뿐이다.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고 당신의 마음에 걸리는 것 없다면 어떤 식이든 괜찮다. 발로키워도 괜찮다. 그 누구도 내가 하는 육아방식에 토를 달수 없다. 그 누구도 내가 하는 육아방식에 손가락질 할 수 없다. 내 스스로가 나만의 육아에 개별적 가치를 높이 부여해보자. 별로인 엄마로 자기 스스로 프레임 씌우지 않길 바란다. 당신의 방식대로 하는 육아도 충분히 가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