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갈 곳 없는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8090 클럽에 간다. 웨이터도 매일 출근하는 내가 익숙한 탓인지 일행 여부를 묻지 않은 인사말이 길어진다. 빈 의자에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자 웨이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맥주와 가벼운 주전부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자, 무대 위에는 여성 기타리스트와 전자피아노 치는 남자가 올라온다. 피아노와 기타의 음색을 맞추며 연주 준비가 끝나자 각자의 의자에 앉는다.
-오늘은 박혜경 씨의 하루입니다. 이 노래 들으면 옛날에 헤어진 전 남친이 생각나는데요.
여자 기타리스트는 옆에 있는 전자피아노의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가 두 손을 벌리고 어깨를 올리며 입을 삐죽거린다.
-물론 새 남친이 지금 제 옆에서 키보드를 치고 있지만,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불쑥 그리울 때가 있어요. 그와 걸었던 길, 그와 먹었던 음식, 그가 했던 행동, 그의 버릇, 그리고......
여자 기타리스트는 피아노 남자의 감정을 훑는다. 고조되는 분위기는 관중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의 스킨십
말을 내뱉자,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남자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핀다.
-에잇, 나 안 해! 노래 부르지 마.
피아노 남자가 화를 내며 일어서자 여자 기타리스트가 남자에게 다가가 입맞춤을 한다. 관객들은 숨죽이며 그들의 사랑싸움을 구경한다. 피아노 남자는 진정되었는지 다시 자리에 앉는다.
-누구나 이별하잖아요. 이별은 헤어지는 게 아니라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내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그 사람,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그때를, 당신은 언제였나요?
기타리스트의 말이 끝나자 노래가 시작한다.
참 나쁘죠. 그대 없이도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하루를 살아요.
이런 거죠 그대 모든 것
조금씩 흐려지다 없던 일이 되겠죠.
벌써 난 두려운 마음뿐이죠
한참 애를 써도 그대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죠.
웃고 있어도 자꾸 눈물이 나요
그대 역시 그렇게 나를 잊어 가겠죠.
왜 그랬나요? 이럴걸. 알면서도
이별이란 이토록 서글픈 모습인데
정말 사랑했는데
벌써 난 두려운 마음뿐이죠
한참 애를 써도 그대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죠.
웃고 있어도 자꾸 눈물이 나요
그대 역시 그렇게 나를 잊어 가겠죠.
왜 그랬나요? 이럴 걸 알면서도
이별이란 이토록 서글픈 모습인데
단 하루도 안될 것 같더니
내가 미워질 만큼 익숙해져만 가죠.
별일 없나요? 그대 역시 나처럼
깨어나고 잠들며 그런대로 사나요?
그대 없이도 아무 일 없다는 거
이별보다 더 아픈 세상 속을 살아요.
웃고 있어도 자꾸 눈물이 나요
그대 역시 그렇게 나를 잊어 가겠죠.
왜 그랬나요? 이럴 걸 알면서도
이별이란 이토록 서글픈 모습인데
정말 사랑했는데 슬픈 하루가 가죠.
하루-박혜경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그를 그리워한다. 노래는 끝 부분을 달려가고, 눈을 떠보니 맞은편에 상현이 앉아있다.
상현: 얘네들 저래 봐도 닭살커플이에요.
나는 무대 위의 남녀를 바라본다. 서로의 눈빛으로 호흡하는 그들의 이별노래는 감미롭고 달달 하다.
오후, 퇴근시간을 갈망하던 그때, 파티션 너머 저 끝에서부터, 퇴직인사를 하는 그가 보인다. 한참을 돌아온 그가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대리: 잘 지내고, 남자 생기면 연락하고, 내가 괜찮은 놈인지 확인해 볼 꺼야. 알았지?
나 : 예
대리: 넌 둔하고 착해서 나쁜 남자들이 이용해 먹기 쉬워, 너 좋다고 하면 먼저 의심해봐
나 : 걱정 마세요. 연애 잘할게요.
대리: 그래, 담에 기회 되면 또 보자.
대리님은 인사를 끝으로 짐을 챙긴다. 그가 내게 노트 한 권을 건넨다.
대리: 아! 이거 줄까?
나 : 뭔데요?
대리: 마케팅 공부한 자료인데, 너에게 도움될 거야. 참고해
나 : 감사합니다.
대리: 이제 정말 간다~
그가 통로를 지나가는 내내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은영은 대리님을 배웅하러 같이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어설프게 동료로 남는 시간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의 안부도 그의 생각마저도 더 이상 물으면 안 되는 사이, 그의 주위를 맴돌 명분도 이유도 이젠 없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고 싶어서 엘리베이터 옆에 난 창문으로 그가 가는 길을 바라본다.
그와 은영이 걸어가는 모습, 그가 주차장에 차 문을 열고 그 안에 짐을 놓는 광경까지도 보인다. 차문이 닫히고 그는 시동을 건다. 그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내가 모르는 길로 빠진다.
갑자기 모든 맥이 빠지고 눈물이 흐른다. 입은 잘 가라고 배웅하는데 눈 안에 고인 물은 쉴 새 없이 흐른다.
웃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나요. 그대 역시 이렇게 나를 잊어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