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Feb 27. 2021

그의 언어

내 카톡에 연락처는 있지만 절대로 연락할 수 없는 한 사람, 그의 프로필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나와 동갑인 그와 만난 건 12년 전이다. 학업과 근무를 병행하고 있던 그때 만난 사람, 그 또한 자격증 공부 중이었다. 우리가 만난 건 전국 대학생 대상으로 하는 어떠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고, 나는 그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일주일간 여름휴가를 냈지만 회사에서 온 문의 전화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대학생 프로그램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팀을 정해 토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팀을 바꿀 때마다 그가 내 앞자리에 있었고, 단지 연락처를 교환하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에게서 선물처럼 매일 아침 인사가 왔다. 일상으로 복귀하여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지쳐간 나와 다르게 제주도로 놀러 간 그가 자신의 풍경을 선사했다.


너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을 샀어, 우리 만날까?’


토요일 오후, 회사 동료의 결혼식의 참석 후, 결혼식장 옆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내게 내민 선물이라는 것이 머리핀과 빈 일기장이었다. 여자 선물은 본인도 처음 주는 거라면서 쑥스러워하며 내게 건넸다.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9월로 넘어가는 푸르름, 동물원의 왁자지껄한 소리,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오묘한 눈빛,

사귀자고 말을 하지 않지만, 뜬금없이 동물원 앞에 서성이는 꼬마 숙녀를 본 그는 내게,


‘아이를 한 명 갖을까? 어때?’


라는 질문을 했다. 너무도 먼 미래의 나는 아무렇지 않게,


‘좋지.’


그는 웃으며,


‘난 딸이 좋아. 너를 닮은 딸.’


말을 던진 후 다른 곳을 보며 멋쩍어했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사소한 일에도 우리가 함께 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그리는 재주가 있었고, 현실 감각에 찌든 내게는 낭만적이라기 보단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듯한 로맨스 소설의 한 부분인 것 마냥 애써 그의 호감을 외면했다.


냉정한 나의 반응에도 그는 늘 나를 기다렸다.


나의 바쁜 시간을 기다려주고, 이기적인 내 모습에도 괜찮다며 다독여주는, 그의 언어, 나는 특히 그의 단어가 나는 참 좋았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어설픈 만남을 뒤로하고 그 또한 자격증을 공부해야 한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연락의 끈을 놓았다. 그렇게 아무런 약속 없이 각자의 삶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 다시 생각한다면 나 또한, 바쁜 시간 와중에 틈틈이 답장을 보냈고, 매일 밤마다 연락을 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만나러 간 것도 나에게는 노력이었다. 그것이 한 달에 한두 번이 될까 말까였지만,


계절이 돌고 돌아서 마지막 만난 날, 그의 입술이 말을 삼키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그의 말을 막으며 책임질 수 없는 그 말을 외면하려고 애썼다.


너의 미래에 나도 같이 있고 싶다는 말,

너와 꿈을 꾸고 싶다는 말,

너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


그에 대한 감정으로 휘몰아칠 때마다 나조차 감당할 수 없는 나의 복잡한 상황이 여리고 선한 그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움이 커져만 갔다.


중견기업 사장 아들인 그, 아버지의 일을 살짝 도와주고 아르바이트비로 받은 금액이 한 달 열심히 일한 내 월급보다 많은 그, 대학생 신분임에도 아버지가 주신 차를 끌고 다녔던 그, 그에 비해 나라는 존재는 잡지에서 본 호텔 브런치처럼 고급스럽고 화사한 그를 넘보는 흙수저에 불가했다.


일 년 뒤 시험은 떨어졌지만 잘 지낸다는 머쓱한 그의 메신저가 왔다. 나는 형식적으로 그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내 쓸모없는 자존감이 그의 발걸음을 끊어버렸다.


나는 지금도 그의 단어를 기억한다. 그가 썼던 어감, 그가 자주 읊조렸던 용어, 그의 잔잔한 음색,


때로는 그의 존재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지만, 그로 인해 내가 한없이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때는 우리는 서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엄청나게 절절하고 애절하지 못했지만 내 기억에 그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그의 편지가 적힌 일기장은

내 책상 모서리에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놓여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