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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14. 2024

14.고치지 못한 대문

청담동에 위치한 마사지&피부관리샵 카운터에 내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탈의실 키를 준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옷을 탈의하고 나오자 중년영화배우가 옷을 갈아입으러 내 옆 탈의실로 들어가는 게 보인다. 연예인의 꾸밈없는 모습을 관찰하던 나를 향해 직원이 방 번호를 알려준다. 방문을 열자 지영이 침대에 누워서 마사지를 받는다. 마사지사가 들어와서 옆에 침대에 내가 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영이 야릇한 신음소리를 섞어서 내게 물어본다.

-결혼식은 준비 잘 되고 있어? 이제 관리 좀 받아야지, 웨딩드레스 입을 때, 팔뚝 살 관리는 필수 인 거 알지?

-응 

-사진은 언제 찍어?

-결혼한달 전으로 예약했어.

-이제 세달 남았나?

-응

마사지사가 점점 은밀한 부위까지 손이 내려오자,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마사지를 받고 나서 뜨거운 욕조 물에 몸을 담그자, 하루의 피로를 풀어버렸는지 몸이 가뿐하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지영이가 계산을 한다.

-내가 낼게~

-괜찮아, 남편 돈 잘 벌어. 벌써 회원카드로 정산했어. 

점원이 회원 카드를 내민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지영은 남편이 사준 귀여운 외제차를 몰고 백화점으로 들어가서, 명품 가방을 색상별로 구입한다.

-그냥, 색상 고르는 것도 지겹고, 디자인만 예쁘면 됐지, 뭐~

지영은 명품가방을 배송 시킨 후, 백화점 VVIP라운지 안 카페에서 부드러운 티라미수를 한 숟가락 떠서 먹는다. VVIP라운지에서 보이는 외부는 풍경은 멀리서 내려다보니 평온하고 평화롭다. 지영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나에게 묻는다.

-어머니랑 그분은 어때?

-오늘도 그분 만나러 가셨어.

-우와~ 장난 아닌데, 어머니도 사실 남자가 필요했던 거 아니야?

-아니야!

갑자기 울컥 토해내듯 말하자 지영이 슬슬 눈치를 본다.

-너 왜이래,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의 거짓말이 거짓말처럼 진실이 되어 버렸잖아. 이젠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고, 어머니는 좋은 사람 만나서 좋고, 다 좋은 거 아니야? 어머니한테 너 결혼한다고 말씀드리고 두 분 결혼 서두르시라고 얘기하면 되는 거잖아. 일이 쉽게 풀리네. 

-그렇지, 미안, 요즘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다 그게 결혼 전 우울증 때문이야, 힘내.

-고마워~

-우린 남들과 다르잖아, 감정 추스르고 마음 굳세게 먹어. 이 고비만 넘으면 나처럼 고상하게 살 수 있어. 

-응 알았어. 사실, 어머님이 내 거짓말을 알아채신 거 같아서 고민이야

-거봐, 내가 뭐랬어? 그런 집안은 사전 조사가 필수지. 그런데도 널 받아 준거야? 

-응, 나보고 거짓말을 절대 들키지 말래.

-이 집안 좀 수상하긴 하네, 정년퇴직이라면서 결혼도 너무 서두르고, 내가 알아봐줘? 잠깐만

지영이 전화를 걸고, 누군가와 한참 통화한 뒤 끊는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지영이 흘린 이야기를 조합해보고 있다. 

-생각보다 간단하네. 너 남친이 전에 결혼하려고 했던 박전무 딸하고 틀어지면서 박전무가 김사장 뒤통수 쳐서 김사장이 회사 그만 두는 거라네. 박전무 딸의 상대가 회장 아들이라며, 박전무가 재벌이랑 연줄 닿으려고 결혼 파기하고 딸을 연결했다는 건데, 음, 원래는 박전무는 딸이랑 회장 아들이랑 연결하려고 같은 대학교로 보냈는데, 회장이 전무급은 레벨이 아니라고 반대했다가 회장 아들이 박전무의 딸이랑 결혼하겠다고 생떼를 부려서 결혼하는 건 가봐. 그 걸 모른 김사장이 한방 먹은 거지, 남친이 다신 결혼 안 한다고 선언했는데, 데리고 온 여자가 너고, 부모님은 울며 겨자 먹기로 널 받아 준 거고. 이거 완전 드라마틱한데. 

-그래? 어쩐지, 쉽게 용서하더라니. 그런데 전화한통이면 파악이 끝나네.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아. 너 다니는 회사가 한국에서 제일 큰 대기업이잖아. 거기에 사장 정도 하면 레벨은 TOP이지, 요즘 집에서 빈둥거리니깐 심심했는데, 네 결혼 이야기가 스릴 넘친다. 

-스릴은 무슨, 나는 지금 현기증 나서 토하기 직전이야. 너 남편은 어느 레벨에 속하는 거야?

-음, 매출액 천 억대 IT 벤처회사를 운영하고 있긴 한데, 원재료가 들어가는 사업이 아니다 보니 손익이 좋은 편인가 봐. 나도 그 정도만 알고 있어. 얼마 전에 주식 상장돼서 나도 하루 아침에 이익을 좀 봤지. 그동안 결혼하려고 진 빚들 한번에 해결하고도 돈이 남아돌아. 

-장난 아니다. 네 남편.

-좋긴~출장도 잦고 집에 자주 없으니깐, 심심해, 요즘 돈 쓰는 재미로 살아. 나도 문화센터 다니면서 취미 생활 좀 찾아볼까봐. 

컵을 들고 커피 한 모금을 깊게 마신다. 지영의 손에 들린 커다란 다이아가 반짝인다.

-예쁘다. 반지 샀구나~

-응 남편이 하나 사줬어. 글쎄 재벌 집으로 시집간 여배우가 혼수로 받은 거라잖아. 알이 커서 손이 아파~

지영이가 손을 내밀며 반지를 부각시킨다. 나는 지영이의 허세에 웃음이 난다.

-많이 변했다. 옛날에 돈 천원에 벌벌 떨던 애가.

-돈이 사람을 만들지, 직장 열심히 다녀봐. 그런다고 인생 달라지겠어? 여자는 무조건 취집이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 남자 꼭 잡아.

-알았어.

지영이는 우아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아메리카노 한 모금 마신다.


현관문을 열자 온기가 잃은 집안 공기가 차다. 어머니가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 밤, 나는 이불 속을 뒤척이며 오지 않는 어머니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서둘러 거실로 나간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기타를 멘 건축가 양반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어머니가 잠옷차림인 나에게 묻는다. 

-너 집에 있었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민낯으로 어색하게 건축가 양반하고 인사를 나눈다. 건축가 양반이 거실에 기타를 놓고 다시 현관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어머니가 막는다.

-온 김에 차 한잔 하고 가세요.

-아닙니다. 따님도 계시고 여자들만 있는 집에 실례죠.

건축가의 말은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가 부재중인 사실을 건축가 양반에게 얘기했다는 의미다. 

-괜찮아요. 잠깐인데요. 딸 괜찮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건축가 양반은 거실 테이블에 앉는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주방에 들어가서 물을 데우시는 동안, 건축가 양반을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신다.

-건물이 오래 됐나 보네요.

-60년 됐죠. 

건축가 양반은 바닥을 손으로 내리친 후 쓰다듬는다.

-오래된 것치고 좋은 재료를 썼네요, 금간 구석이 없는 거 보니. 

-예, 외할아버지에게 물러 받은 후, 아버지가 직접 발품 팔아서 수리한 집이에요.

순간 아차 싶었다. 자연스럽게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에 입을 닫는다. 건축가 양반은 불편한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들어올 때 보니깐 대문 고리가 고장 났던데요. 안 고쳐요?

-고치긴 해야 하는데, 고치는 방법도 모르겠고, 이젠 익숙해져서 불편하진 않아요.

어머니가 우려낸 차와 다과를 쟁반에 받쳐서 가져오신다. 찻잔을 나와 건축가 양반에게 나누시며, 건축가 양반에게 아버지가 사용하던 컵을 놓는다. 건축가 양반이 차 한 모금 마신 뒤 누그러졌는지, 자연스럽게 반말로 나에게 얘기한다.

-영자씨는 기타를 잘 치네.

30년 같이 산 나도 못 불러본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건축가 양반이 생소하다.

-아버지가 기타를 잘 치세요.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도 건축가 양반은 웃는다.

-영자씨에게 들었어요, 요즘 내가 오히려 영자씨한테 배우고 있죠. 다음 주에 기타 동호회 콘서트가 있으니 영자씨 노래 들으러 와요, 노래 실력이 수준급이셔요. 

-잘하긴요~ 아니에요.

어머니의 애교 섞인 앙칼진 목소리, 나는 확답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두 분은 계속 동아리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풀어 놓는다. 서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두 분의 이야기에 나는 들러리처럼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킨다.

-전, 할 일이 있어서 방에 들어가 볼게요. 두 분 더 얘기 나누세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얘기에 집중하신다. 방 안에 누운 내 귀에 간간히 들리는 어머니의 웃음소리와 건축가 양반의 말소리가 방문을 넘나든다.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린 어머니의 행복함이 나를 쓸쓸하게 만든다.

거실에 있던 그가 나가자, 어머니는 배웅을 하러 따라 나간다. 나는 방 창문으로 자동차 앞에서 두 분이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다가 떠나가는 자동차에 손을 흔드는 어머니를 훔쳐본다. 차가 떠나고 추웠는지 두 팔로 온몸을 감싼 어머니가 삐거덕 거리는 대문을 닫으며 들어오신다. 어머니는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를 한다. 나는 어머니의 등을 본다.

-엄마

-왜? 

-저 아저씨랑 결혼할 거야?

엄마는 설거지통을 붙잡고 한참을 웃는다.

-아니, 우린 친구야

-사귀는 거 아니었어?

-아닌데

-만나봐, 취미도 같고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엄마가 숨을 고른 뒤, 다시 설거지를 한다. 

-넌 새 아빠가 생겨도 괜찮아?

-나야, 엄마만 좋다면야 괜찮지.

-넌 아빠를 잊었어?

-10년이 지났어, 우리 버리고 다른 사람이랑 잘 살고 있는 사람이 그리워지겠어?

-그렇지. 연주아빠도, 나도, 이젠 행복해야 할 텐데.

엄마는 씁쓸한 미소만 짓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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