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술집에서 모인 전략본부 회식은 준호가 속해 있는 전략 2팀이 주도했다. 송전무는 틈틈이 준호를 불러서 술을 권했고 준호는 술에 취했음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송전무를 대접했다. 송전무가 준호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을 섞었다.
송전무 옆에 앉은 준호와 나를 연결해준 최대리가 나를 보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는다. 준호의 얼굴이 달아올랐음을 그의 뒤통수만 봐도 알 수 있다. 멀리 떨어진 테이블 탓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무님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통에 짐작이 확신이 되고 있다.
-홍대리 이리로 와봐.
전략본부에 홍대리는 나밖에 없는 관계로, 나는 조신하게 일어나서 송전무 옆으로 가자 최대리가 자리를 비켜준다.
-김대리랑 결혼한다고?
-예.
-김대리, 매일 야근하더니, 둘이 언제 눈 맞았어?
-좀 됐습니다. 전무님
송전무님의 축하와 함께 순식간에 회식자리에서 나와 그의 연애가 안주가 되어 씹힌다. 자리로 돌아오자 부장이 요즘 최고의 혼수는 속도위반이라고 말하고는 능글맞게 웃는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최과장을 본다. 최과장은 술을 연속해서 마신 뒤 나에게 술을 권한다.
-축하해, 결혼
-예, 감사합니다.
-너 말이야, 착하게 살면 못써.
-예?
-끝까지 입 다물어라, 아니면 남자새끼들은 잇속이 빨라서 도망가.
회사 입사했을 때, 사수였던 최과장과 함께 갔던 첫 출장, 그가 내게 고백했고 나는 최과장과 회사 내 비밀 연애를 시작했다. 그가 나를 외면한 건, 우리 집 사정을 들은 직후였다. 25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내게 짧고 쓴 첫사랑이었다.
서울시내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최고층 식당, 은은한 음악과 붉은 와인이 오른 금요일 날 저녁 테이블을 건축가 양반과 마주 앉아 있다. 예상대로 달그락 거리는 식기구 소리만 테이블 위를 채운다. 나는 운을 뜬다.
-저번에 다치신 데는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식사 초대해서 당황스러웠죠?
-아닙니다. 누구나 사례하는 방법은 다양하니까요.
부담을 느꼈다는 뉘앙스, 매몰차게 거절을 못해서 억지로 끌려온 낯선 이와의 식사가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돗자리를 깔기 위해 부산하게 밑밥을 깐다.
-무슨 일 하세요?
-건축 일 합니다.
-아! 그러시구나. 건축 일은 힘들지 않으세요?
-건축 설계 일이라 실내에서 주로 합니다. 현장은 가끔 나갑니다.
다시 찾아오는 침묵, 나는 재빠르게 핸드폰으로 건축가 양반의 신상을 훑는다. 여가생활에 기타 동아리 활동을 재차 확인한다.
-주로 여가시간에 뭐하세요?
-요즘 기타를 배우고 있습니다. 소싯적에 기타를 연주했는데, 한동안 기타를 치지 않았더니 손이 굳었더군요. 기타모임에 가입해서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공통된 소재인 기타 얘기에 어머니가 호들갑을 떤다.
-저도 기타 칠 줄 아는데요. 재미있겠어요. 다시 배워 보고 싶네요.
-기타를 치실 줄 아세요? 얼마나 치셨어요?
-한 20년 정도요. 10년 동안은 기타를 안쳐서 잊어버렸죠.
-그래요? 저희 기타 모임에 같이 가실래요?
-예, 좋아요.
급하게 진전되는 얘기에 나는 핸드폰을 테이블 밑에 숨겨 놓고 지영에게 문자를 보낸다.
‘전화 줘’
때마침 울려준 지영의 전화로 인해 예의를 구하고 자리를 비운다.
-무슨 일이야?
-그 건축가랑 저녁 먹어.
-아! 니 예비 아버님, 분위기는 어때?
-아직까지는 어색해하시지, 그래도 공통점을 찾아서 다행이다. 두 분 기타 좋아하시더라고
-아, 너희 아버지가 이런 자리도 돕는구나.
-아버지 얘기 꺼내지마.
-너 영암 갔다 와서 아버지 얘기에 민감한 거 알아? 영암가서 무슨 일 있었어?
-그래? 그냥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니깐 그러네.
-힘내, 이때가 제일 힘들어.
-고맙다 친구.
아직도 두 분은 어린 시절 좋아하던 음악세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서 급하게 가방을 챙긴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맛있게 식사하세요.
그제야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붙잡는다.
-계산은 내가 했어, 나중에 전화할게.
어머니를 외면하고 식당 밖으로 나간 후,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와서 어머니와 건축가 양반의 테이블을 바라본다. 건축가 양반의 기타를 치는 포즈가 재미있으신지 어머니는 연신 웃으신다. 다행이다. 안심하면서도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향해 웃는 모습, 며칠 전 아버지의 재혼 소식에 식음을 금했던 사실이 떠오르면서 내 예상과 다른 배신감이 든다.
토요일 아침부터 옷이 없다 타박하시던 어머니가 평소에 입지 않으시던 원피스를 입으시고, 거울을 보며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바르시며 멋을 내신다.
-연주야, 엄마 기타 못 봤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누워서 자는 나를 깨워서 본인의 기타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 나는 모른다는 제스처로 고개를 좌우로 돌린다.
-그 커다란 게 어디 갔을까? 발이 달렸을까? 신발을 신었을까? 어디 갔을까?
아버지가 떠난 후,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예전 모습, 아버지 앞에서 항상 쫑알거리며 애교 부리던 어머니가 돌아왔다. 괜스레 주방에 가서 빈 밥통을 열어보고 투덜거린다.
-주말인데 밥 안줘?
-밥은 네가 대충 차려 먹어, 어차피 점심에 남자친구 만난다며~
-아침밥은 먹고 가야지~ 배고프단 말이야~
-라면 끓어 먹어.
나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있다. 엄마는 베란다에서 찾은 기타를 꺼내어 먼지를 털어낸다. 거실에 앉은 어머니는 웃음기를 품은 채, 기타를 수건으로 쓰다듬고 계신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같이 노래 부르던 예전 모습이 떠오른다. 화사하게 예쁘던 어머니, 살랑대는 커튼 사이로 두 분의 애틋한 눈빛 교환을 볼 때마다 아직 사랑을 모르던 나의 볼도 부끄럽게 달아올랐다.
어머니는 무거운 기타를 끌며 현관에서 신발을 고르신다.
-내가 차 태워 줄까? 기타 무겁잖아.
-괜찮아, 진석씨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 갔다 올게.
건축가 양반 성함을 어머니에게 들으니, 둘 다 내가 모르는 타인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