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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13. 2024

13.이문세'옛사랑'

날씨가 무덥다. 싱그러운 플라타너스가 한 줄로 깔린 도로의 모퉁이로 빠지는 청담동 골목길에 브런치 카페가 줄지어 있다. 태양 볕이 뜨거워진 탓인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준호에게서 전화가 온다.

-회사에 들렀다가 바로 갈게. 송전무님이 급한 일이라고 하시네.

-어, 알았어.

-어머니랑 먼저 만나고 있어. 

-응, 조심히 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오빠의 미안함을 달랜 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브런치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브런치 카페 카운터에서 여사님의 성함을 말하자 점원이 길을 안내한다. 창밖 너머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 테이블 방에 여사님과 두 명의 친구 분이 앉아 계신다.

-안녕하세요. 

무난한 회색 톤에 하얀색 진주알로 기품을 살리신 여사님은 친구 분들에게 내 소개를 한다.

-애가 내 며느리

-어머 예쁘게 생겼네.

친구 분들은 나를 견적 뽑듯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아버님은 뭐하시고?

-사업하십니다.

조신하게 말하자 여사님이 말을 거든다.

-건축가

-멋있으시네. 건축사무소 어딘데?

-나, 며느리도 왔고 결혼 준비하느라 먼저 일어날게~

심기를 건드린 여사님의 목소리, 친구라고 믿어지지 않은 두 명은 여사님 눈치를 살핀다.

-가자

-예, 어머님

나는 여사님 뒤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온다. 여사님은 운전기사가 열어준 오른쪽 뒷좌석에 앉고 난 왼쪽 뒷좌석으로 여사님과 나란히 앉는다. 운전기사가 출발한다.

검정색 고급세단이 사거리 대로변으로 나오자 유입되는 차량이 많아지면서 지체되기 시작한다. 침묵한 세단 내부에서 나는 여사님의 눈치를 보고 있다. 

-어머님, 날씨가 좋네요~

-김기사, 볼륨 업

나의 말을 잘라 드신 여사님의 말에 운전기사는 볼륨을 조절하여 음향을 키운다. 잔잔하게 들리는 클레식이 클라이맥스를 치닫고 있자 여사님이 입을 연다.

-입조심해. 거짓말을 들켜서는 안 된다. 들키는 순간 넌 아웃이야.

습도와 온도가 적절히 유지되는 차 안에서 한기가 느껴지고,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침을 꼴깍 삼키며 곁눈질로 여사님을 쳐다본다.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면서 나의 행동을 관찰하셨다는 사실이 소름 끼친다. 내가 과거에 실수한 게 없는지,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겁에 질린다. 

호텔 입구에 세단이 정차하자, 직원이 직접 차문을 열며 마중을 나온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이쪽입니다.

여사님이 그들의 호의를 받으며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미 돈으로 처바른 얼굴과 팔아버린 양심을 따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태생부터 매뉴얼로 습득된 비굴해지는 방법, 이럴 땐 최대한 뻔뻔하게 빠른 걸음으로 여사님 뒤편으로 따라붙는다. 

그들이 인도하는 호텔 웨딩홀 VVIP 전용 상담실은 축소된 웨딩홀처럼 웅장하고 화려하다. 돌아가는 눈알을 멈추고 소파에 앉아 계신 여사님 뒤에 서자, 말쑥하게 차려입은 핸섬한 담당자가 90도를 숙이며 인사한다. 담당자는 여사님 옆으로 다가가 무릎 꿇고 태블릿을 작동시켜서 웨딩홀 내부 사진을 보여주며 포인트 지점을 확대한다. 

- 이 상들리제는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해 온 제품입니다. 이 대리석 장식은 독일에 유명한 작가를 호텔에 모셔서 작업한 작품입니다. 이 카펫으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뜬 제품입니다. 고급스럽죠?

여사님의 귀찮은 듯한 표정을 읽은 담당자가 화제를 돌린다. 

-지난달에는 연예인 P군이 결혼했으며, 지난주에는 K대기업 차남 결혼식, 얼마 전 정치가 L씨 아들이 결혼한 곳입니다.

-결제

여사님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기사가 앞으로 나온다. 담당자는 90도로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여사님, 언제로 예약할까요?

-9월 넷째주 토요일

-예 알겠습니다.

여사님이 호텔 로비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호텔 직원이 차문을 열어준다. 발레 파킹 요원이 뛰어오는 운전기사에게 차 키를 전달하고, 달려온 웨딩홀 담당자가 차가 떠날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검은색 고급 세단은 2km를 건너서 주얼리샾으로 이동한다. 세단이 멈추자 직원들이 자동차 주위를 에워싼 후, 차문을 열며 여사님을 반긴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여사님이 들고 온 파우치를 받아 든 매니저는 여사님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여사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자, 직원이 막 우려낸 홍차를 커피 잔에 담아서 여사님 앞 테이블 위에 올린다. 매니저가 보석 세트를 하나씩 선보인다. 

-이건 이탈리아 수석 보석 디자이너 알베르토가 직접 세공한 작품으로 목걸이, 귀걸이, 반지에 들어간 다이아몬드가 총 10캐럿입니다. 어떻습니까?

-별로

매니저는 거절에 당황한 기색 없이 다음 제품을 보여준다.

-브라질에서 발견한 10캐럿 다이아로 만든 반지입니다. 얼마 전에 재벌가로 시집간 여배우가 예물로 받은 것으로 유명하죠? 귀걸이는 할리우드에 유명 배우가 시상식에 착용한 제품입니다.

-보류

여사님은 홍차를 들이켜며 홈쇼핑 보듯 매니저의 상품평을 구경한다.

-다음 제품은 H대기업 재벌 아드님이 결혼식 예물로 준비한 걸로 유명한 핑크 다이아입니다. 핑크 다이아는 희귀하신 거 아시죠?

분홍색 빚이 도는 다이아몬드가 붉은 포에 쌓여서 전시된다. 여사님이 비서에게 손가락으로 까닥하자 비서가 매니저에게 카드를 내민다. 여사님이 일어서서 문 밖으로 나가자 직원이 서둘러 차문을 열어드린다. 매니저가 내 손가락 사이즈를 잰 후, 나는 품격 있고 우아한 손짓으로 나머지는 비서를 가리킨다. 내가 걸어가자 직원들이 가게 문을 열어주며 내가 지나갈 때까지 대기한다. 다른 직원이 나와서 차문을 열어주자 나는 차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차 안에서 여사님 기에 눌리지 않도록 꼿꼿이 앉아 있다.  

전화벨소리가 울리자 나는 핸드폰을 본다. 준호다.

-여보세요. 

-여보~ 지금 업무 끝났어, 어디야?

-어머님이랑 쥬얼리샾 앞에 있어요.

-거기서 기다릴래?

-어머님이랑 담소 나누면서 어머님을 댁에까지 모셔드리려고요. 집으로 오세요.

-알았어~

-네.

전화가 끊어지자, 여사님이 말을 흘린다.

-재미있는 아이네.

운전기사가 차에 오르고 적막한 세단은 도곡역으로 출발한다.


준호의 차안, 강남역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나마 준호의 차를 타자 긴장이 풀렸는지 노곤해진다.

-엄마 때문에 곤란 한 건 아니지? 미안해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서.

-괜찮아요, 오빠도 일하느라 힘들었지요?

-아니, 이 귀여운 여우~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오빠가 귀엽다는 듯이 내 볼을 꼬집는다.

-오늘 친구들 모임 있는데 혹시 같이 가도 괜찮아?

-오빠 친구들이면 당연히 같이 가야죠. 

-사랑해~ 여보~

끈적끈적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칵테일바 안에 남자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다. 준호와 내가 도착하자 반가운지 박수를 친다.

-저기 신랑신부 온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예전에 인사한적 있는 준호의 친한 친구 영진이라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한다.

-결혼식 준비 잘 되가?

-아직 멀었어, 이젠 3~4개월 남았나?

-축하해, 아! 맞다. 어제 저녁에 연주씨 봤는데.

-어디서요? 

-레스토랑에서요. 가족분이랑 식사하시던 거 같은데 맞죠?

고급레스토랑 안, 건축가 양반과 어머니, 어제 저녁을 먹은 기억을 상기시킨다. 준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본다.

-아버님 지방에 계시잖아.

-네, 외삼촌이세요. 외국에 사시는데 잠깐 한국에 오셔서 같이 식사했어요.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양산한다. 이 거짓말로 인해, 하객대행서비스에 결혼식 전까지 있지도 않은 외삼촌을 대신할 사람을 구해 달라고 해야 한다.

준호 친구들과 모임이 끝나고 집 현관문을 열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다. 어머니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으셨다. 항상 집에서 나를 반기던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 늦은 시간까지 부재중이라는 사실이 낯설다. 나는 옷을 대충 걸친 후, 대문 앞에서 어머니가 돌아오시길 기다린다.


대문 앞 골목길을 왔다 갔다 걷는다. 난 10년 전에도 골목길을 거닐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돌아오실 거라는 기대, 내가 좋아하는 순대를 손에 쥐고 나를 반갑게 안아줄지도 모른다는 상상, 기다림은 길어지고 나는 서서히 지쳐간다. 절대 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난 항상 이곳에 서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헤드라이터 불빛이 골목길로 들어오고 나는 대문 뒤로 숨는다. 차가 멈추고 엔진소리가 잠잠해진다. 건축가 양반은 뒷좌석에 있는 기타를 꺼내서 어머니에게 넘겨준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는지 엄마가 깔깔 웃는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뵙죠.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건축가의 차는 골목길을 떠난다. 어머니가 다른 남자의 배려를 받는 게 불결하다. 나의 거짓말로 인해, 아버지를 쉽게 버린 어머니의 홀가분한 모습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난 아직도 아버지를 버리지 못해서 아버지라는 단어에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어머니가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 텅 빈 하늘 밑 불빛을 켜져가면, /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 /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 후회가 또 화가 난 눈물이 흐르네, /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 걸 /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 그대 생각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 흰 눈이 내리면 들판을 서성이다. /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 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혀가고 /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이문세 옛사랑-]


글픈 음색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자, 어머니에게 격노했던 나의 부족함이 녹아 내린다. 오히려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추억을 앗아간 것 같아서 다시 마음이 서글프다. 나는 정말 못된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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