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명훈은 어제저녁 상담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냉담한 거부와 억제된 절망을 간직한 채 허공을 바라보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상담소로 가는 차 안에서 여러 번 통화를 시도했지만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첫 상담을 끝내자마자 명훈의 회사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최 대리도 명훈을 걱정하고 있었다. 비서인 자신과 공유하는 일정표에 아무 내용이 없어서 거래처에 전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명훈이 내 상담소로 온 것은 두 달쯤 전이었다. 내가 출연한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때 직원이 들어와서 물었다.
“친구라는 분이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는 상담실로 안내하라고 말하고 TV를 껐다. 매직미러 너머로 보이는 사람은 명훈이었다. 명훈은 벽에 걸린 푸른색 캔버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창문도, 창밖의 나무도, 커튼 뒤에 숨어서 비밀스러운 입맞춤을 하는 남녀까지도 모두 파란색인 그림은 뭉크가 유부녀와 은밀한 사랑에 빠졌을 때 그린 것이다.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갈망은 이목구비 없이 뭉쳐진 남녀의 얼굴로, 용인받지 못하는 사랑은 우울한 푸른색으로 표현되었다.
상담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피로가 두껍게 쌓인 명훈의 얼굴을 보며 농담을 건넸다.
“야, 옷 좀 사 입어라. 부자가 소비를 해야 경제가 돌아가지.”
십 년 전쯤 유행했던가? 요즘은 아무도 쓰리 버튼 양복을 입지 않는다.
“돈을 벌기는 어렵지만 안 쓰기는 쉬우니까.”
“멋대가리 없는 건 여전하구먼. 웬일이야?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납시고.”
“네 시간 좀 사려고.”
다짜고짜 내 시간을 사겠다고 하니 기분이 상했다. 명훈은 늘 이런 식이다.
“우리 의진이가 졸업도 하기 싫고, 유학도 가기 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단다.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상담자의 자세로 돌아갔다. 명훈이 정식으로 상담을 받 을지 아니면 한 번으로 그칠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이나 심리 따위에 신경 쓸 명훈이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해 보라고 했다. 명훈은 본론만 짧게 말하던 평소와 달리 꽤 길게 하소연을 했다. 자신이 한 말들을 요약해서 써 보라고 하자 명훈은 다섯 개의 문장을 적었다. 눈을 감으면 인간의 의식은 내면을 향하게 되고, 문제의 경중을 파악하는 데는 점수보다 유용한 게 없다. 명훈의 눈을 감긴 다음 각 문장의 점수를 물었다.
‘딸이 걱정이다’에는 백 점을 주었지만 ‘딸이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걱정된다’에는 오십 점을 주었다. 나는 가장 낮은 점수를 준 항목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왜 이런 점수를 주었는지 물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내 딸을 사랑할 리가 없어. 딸 때문에 가슴이 아파. 꿈도 소망도 없고, 하고 싶은 공부도 없어. 손톱에 그림을 그리고, 발목이 부러질 것처럼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밤늦게까지 놀기만 해.”
명훈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내 딸을 사랑할 리가 없어’에 주목했다. 딸이 사랑받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는 말인데, 이 역시 문제의 본질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는 모두 불행해? 딸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아.”
“험한 세상이니 남자의 보호가 필요하잖아.”
“딸이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할 거라는 걱정과 딸을 사랑해 줄 남자가 없을 거라는 걱정은 다르지 않을까?”
“아버지가 자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 아냐?”
명훈이 짜증을 냈다.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거면서 여기는 왜 온 건데.”
“가면 될 거 아냐.”
명훈이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화를 내고 일어섰으니 다시 안 오리라 예상했다. 잠시 뒤에 직원이 들어와서 말했다.
“친구분이 8회치 상담료를 내고 가셨어요.”
나는 적잖이 놀랐다. 명훈의 내면에 모종의 갈등이 있는 건 분명했다.
명훈은 집에도 없었다. 명훈의 아내는 “운전 중이거나 회의 중이겠죠, 뭐”라고 심상하게 말했다. 내 말투나 억양에 걱정이 묻어났을 텐데도 무심하기만 한 그녀의 태도가 마땅찮았다.
내담자가 올 시간이라 상담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녹음기를 켜기 위해 책상 너머로 손을 뻗는 순간 커피 잔이 쓰러졌다. 휴지를 뽑아 커피를 닦고 있을 때 내담자가 들어왔다. 듣고, 질문하고 또 듣기를 반복했지만 일정표에 아무 내용도 없다는 최 대리의 말만 뇌리를 맴돌았다. 마땅히 연락해 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명훈은 골프도 치지 않았고 이런저런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 명훈 의 소재를 비서인 최 대리도 모른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명훈의 회사로 갔다.
명훈의 방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건 지나친 질박함이다. 그 흔한 가죽 소파 하나 없었다. 회의용 탁자와 의자, 천장에 매달린 빔프로젝터, 창가에 놓여 있는 책상 하나가 전부다. 언젠가 명훈에게 물었다. 벽에 그림이라도 하나 걸거나 탁자 위에 꽃병이라도 놓으면 방이 환해지지 않겠느냐고. 있을 건 다 있는데 뭐하러 낭비를 하느냐는 핀잔만 들었다.
“아직 연락 없어요? 아무 일정도 안 올라왔고?”
최 대리가 인사말을 건네기도 전에 물었다.
“없어요. 갑자기 출장을 가시기도 하니까 댁에는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제게는 꼭 연락하시는데 걱정이네요.”
최 대리가 태블릿 PC를 보여주며 말했다.
“근데 어쩐 일로 방이 훈훈하네요?”
“아, 사장님이 안 계셔서 온도를 좀 높였어요.”
고자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어색한 표정을 짓던 최 대리가 이내 덧붙였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인데 낭비하면 안 된다고 하셔서….”
“사장 인심이 그렇게 박하니 힘들겠어요?”
“아뇨, 그건 아니예요.”
최 대리가 정색하며 펄쩍 뛰었다.
“아낄 건 아끼자는 주의지만 무조건 그러시진 않아요. 이사할 직원의 전셋돈이 부족하지 않은지, 임신한 여직원이 힘들지 않은지 세심하게 배려하세요. 우리 사장님 속은 따뜻한 분이세요.”
직업상 나는 사람들이 쓰는 단어에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따뜻하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였다. ‘따뜻하다’라는 단어에 꽂혀있을 때 명훈의 책상 위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네, 네. 연락은 없었고요. 친구 분이 와 계신데, 박 소장님이시라고 사장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아, 네, 잠깐만요.”
최 대리가 수화기를 가슴에 대고 물었다.
“S 전자 서 이사님이라고, 참, 얼마 전 장례식장에서 보셨죠? 소장님과 통화하고 싶다고 하세요.”
수화기를 받아들자 여자가 “잠깐 뵐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명훈에 대해 무슨 얘기든 해 줄 법 싶은 여자의 제의가 반가웠다. 여자가 저녁에 상담소로 오겠다고 했다.
“이 분과 명훈이 상당히 가까워 보이던데…. 막연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맞아요. 우리 사장님을 웃게 하는 유일한 분이세요. 중요한 고객이기도 하고요.”
최 대리가 말했다. 나는 ‘웃게 하는’에 또다시 방점을 찍었다.
여자를 명훈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처음 보았다.
명훈의 상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은 고향에 있는 병원이었다. 기차가 두어 시간 만에 나를 고향에 데려다 놓았다. 택시를 타기 위해 역 광장을 가로질렀다. 바람결에 섞여 있는 바다 냄새가 고향에 왔음을 느끼게 했다. 택시가 중심가를 지나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눈앞에 건물로 뒤덮인 산이 나타났다. 애벌레에게 갉아 먹혀서 가장자리만 남은 나뭇잎처럼 산은 겨우 둥그런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언덕에 오르자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병원이 보였다. 택시에서 내려 장례식장 쪽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서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하지만 파란색 추억 속에 명훈은 없었다. 명훈은 헤엄치는 무리 속에 낀 적이 없었다. 고함소리가 상념을 깼다.
“내 손으로 꽁꽁 묶어서 묻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내 마누라야. 집으로 데리고 갈 거야.”
“죽은 엄마까지 아버지 마음대로 하겠다는 겁니까? 제발 좀 그만 하세요.”
친구들 모두 명훈 부자의 불화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까지 싸우다니. 좁은 공터를 서성이며 언제 들어가야 할지 고민했다. 바다와 맞닿을 듯 내려앉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구름은 형태를 바꿔가며 수평선을 따라 흘러갔다.
“외삼촌도 들었잖아요. 이런 억지가 어딨냐고요.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엄마 남편이니까, 엄마를 존중하기 위해 예를 다했어요. 이제 더는 못 참겠어요.”
등을 떼밀려 밖으로 나오는 명훈이 보였다. 관자놀이의 힘줄이 도드라진 얼굴은 붉다 못해 자줏빛에 가까웠다. 외삼촌이라 불린 사람이 명훈의 등을 몇 번 토닥여 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명훈 쪽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바닥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얼굴의 반을 가릴 정도로 큰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장례식장으로 오고 있었다. 여자를 본 명훈의 얼굴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되었다. 명훈은 나를 지나쳐 여자에게 다가갔다. 햇빛이 반짝, 하고 명훈의 눈 아래 머물렀다. 여자의 손이 명훈의 어깨를 지나 햇빛이 머문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여보, 당숙께서 빨리 들어오래요.”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오는 명훈의 아내는 검은 상복 탓인지 작은 키가 더욱 작아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남편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꽂혔다. 여자는 황급히 손을 내렸고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명훈은 아내 쪽으로 돌아섰다. 여자는 아내에게 팔을 잡힌 채 안으로 들어가는 명훈의 등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여자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서 이사님. 일찍 오셨네요. 왜 안 들어가고 여기 계세요? 아,
소장님도 오셨네요. 제가 먼저 왔어야 하는데.”
최 대리였다. 나는 여자와 최 대리의 중간쯤 되는 곳에 서 있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이사님, 사장님하고 제일 친한 친구 분이세요. 소장님, 우리 회사 제일 큰 고객이신 S 전자 서 이사님이세요.”
여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 먼저 갈게.”
여자는 마치 조문을 마친 사람처럼 말했다. 최 대리가 여자에게 조심해서 올라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검은색으로 온몸을 감싼 여자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갔다. 성난 듯 들뜬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갯내음이 섞인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최 대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영정 사진 속 명훈의 어머니는 웃고 있지 않았다. 곤고했던 세월의 흔적이 깊은 주름 속에 배어 있었다. 미인도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고운 분이셨는데…. 속쌍꺼풀 진 눈과 곱고 단정한 입매가 명훈에게 그대로 있었다. 국화꽃 한 송이를 올리고 절을 한 다음 접객실로 갔다. 친척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명훈이 안경을 벗었다. 눈자위가 순식간에 붉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눈을 꼭 감는 모양새가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참으려고 애쓰는 그의 의지와 달리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삼켜지지 못한 울음은 이내 통곡이 되었다.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명훈이 꺼이꺼이 울었다. 음식을 상에 놓던 명훈의 아내가 인제 그만 울어도 되겠구만 또 저런다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여섯 시가 조금 지났을 때 남빛 바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상담소로 들어섰다. 여자의 머리 모양이 짧은 커트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보았을 때는 어깨를 덮는 긴 머리였다. 파란색 옷 때문인지 여자를 보는 순간 뭉크의 그림이 떠올랐다.
“명훈을 소리 내어 웃게 하는 유일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자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제가요? 누가 그러던가요?”
“최 대리가요.”
“그래요? 명훈 씨 잘 웃는데 이상하네요.”
내 기억 속에 명훈의 웃음소리는 없었다. 공부는 잘했지만 침울한 아이였고, 가족들 걱정에 한숨 쉬는 어른이었다.
“어제 명훈이 상담 받는 날이었습니다. 전화기는 꺼져 있고 출근도 안 했더군요. 걱정돼서 회사로 갔던 겁니다.”
“저도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아서 전화했던 거예요. 그런데 상담을 받으러 가긴 갔군요. 딸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친구 중에 심리상담가가 있다기에 애 데리고 가보라고 했는데.”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자가 말했다.
“가까운 사인가 봐요? 그런 조언까지 할 정도면.”
“글쎄요, 오래된 사이라고 봐야죠. 제가 명훈 씨 첫 고객이었어요.”
이십 년 전 명훈은 전자제품 접속 회로인 커넥터를 파는 것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S 전자 대리였던 여자가 소량의 오더를 냈던 이유는, 접대라는 개념 없이 제품의 성능에 대해서만 주르르 설명하는 명훈이 딱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의 우려가 무색하게 명훈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는 중이었다.
“처음으로 대량 구매를 했을 때 명훈 씨가 선물이라며 책을 줬어요. 새 책도 아닌 것을 포장도 하지 않고 줬지요.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정말 이상했겠군요.”라며 공감을 표시했다.
“인간 등고라는 문고판 책이었어요.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서 일독을 권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어려운 책이었어요.”
나는 인간 등고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내게 절대로 빌려주지 않던 책이었다. 칠십 년대 초에 나왔다가 절판된 희귀본이었다. 나는 나중에 ‘인간 등정의 발자취’라는 제목으로 나온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었다. 명훈은 아마존에서 DVD 세트도 샀다.
“두 번째로 받은 책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였어요. 여기저기 밑줄이 쳐져 있고, 표지는 낡아서 끄트머리가 해어져 있었어요. 공돌이라는 약점을 극복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면서 명훈 씨가 웃었어요.”
여자는 명훈과 많은 책을 돌려가며 읽었고, 소감이 일치할 때면 명훈이 소리 내어 웃곤 했다고 말했다.
“처음 받았던 두 권의 책은 명훈 씨 손때 위에 세월이 덧입혀져 노르스름하게 변한 채 지금도 제 책장 맨 위 칸에 꽂혀 있어요.”
명훈은 내게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여자를 보았고, 범상한 관계가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내 짐작 이상으로 가까웠던 모양이다. 일곱 시가 넘었다. 시장했다. 최 대리에게 전화해서 명훈의 소식을 들으면 바로 알려 달라고 부탁하고 자리를 옮겼다. 조용해서 이야기하기 좋은 프랑스 식당이 있었다. 식당 앞에 차를 세웠을 때 여자가 아, 여기는 명훈 씨와 처음 식사한 곳인데요, 마지막으로 온 곳이기도 하고요, 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나 역시 명훈이 덕분에 알게 된 식당이었다.
그나저나 마지막으로 온 곳이라. 그렇다면 지금은 명훈을 만 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훌륭한 상담자는 앞서가면 안 된다. 식당 안에는 슬픈 듯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쇼팽이네요.”
여자가 말했다.
“쇼팽 좋아하세요?”
“제가 아니라 명훈 씨가 좋아해요. 초핀이라고 읽었다가 망신당한 적이 있어서 쇼팽만 섭렵했다는데 작품번호까지 다 외워요. 그런데 댄서의 순정 같은 노래도 듣죠.”
“아니, 명훈이 그런 노래도 듣는단 말입니까?”
“어느 날 명훈 씨 차에 오르니 댄서의 순정이 흐르고 있더군요. 이런 노래도 듣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길래 질문을 잘못했나보다 생각했어요. 다음 날 아침 메일을 받았는데 온종일 웃음이 나왔어요. 명훈 씨다운 대답이었죠.”
음악이라야 운전할 때 듣는 게 거의 전부인데, 요즈음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예(禮)와 악(樂)에 관한 공자님 말씀이오. 예는 같은 인간을 상하로 구분 짓는 것이고, 악은 구분 지어진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그 냥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무거나 하나씩 사서 듣고 다니오. 잠도 쫓을 겸…. 불이일여 성속일여 클래식뽕짝 역일여(근본도 하나고 성속도 하나이니 클래식뽕짝 역시 하나) 아니오?
여자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내가 아는 명훈이 아니었다. 여자가 아는 명훈은 앞뒤 없이 꽉 막힌 공돌이나 짠돌이가 아니라 감성에 유머 감각까지 겸비한 남자였다. 하긴 이 식당으로 나를 불러냈을 즈음의 명훈도 예전에 내가 알던 명훈과는 좀 달랐다. 느끼한 음식을 싫어하는 명훈이 비싸기까지 한 식당으로 불러낸 게 의외였지만 그저 장례식 여파겠거니 했다. 명훈은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기 저쪽, 테라스가 좋은데 누가 벌써 예약을 했다네.”
흰색 테이블 사이로 피어 있는 제라늄 때문인지 테라스의 분위기는 상당히 낭만적이었다.
“이 집 분위기 좋다. 여자들 취향인데?”
“엄마가 부처님 같은 사람이라서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계절에 가셨나 봐.”
명훈이 동문서답을 했다. 평소처럼 끝이 똑똑 떨어지는 말투가 아니라 온유한 어조였다. 웨이터가 “와인은 늘 드시던 것으로 할까요?” 하고 물었다. 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묻지도 않고 식사를 주문했다. 나는 명훈이 이렇게 비싼 식당에 자주 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놀랐다.
“아버지가 엄마를 죽였어.”
잔잔하게 흐르는 바이올린 선율과, 마당에 나뒹구는 밥상과,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고함소리가 뒤섞였다. 명훈의 아버지는 요즘 같았으면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을 폭력 가장이었다.
“암 덩어리가 엄마의 대장을 완전히 막고 있었단다.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아프다는 내색조차 못 하셨겠냐.”
명훈이 와인 잔을 단숨에 비웠다. 명훈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고 나도 한 모금 마셨다.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네 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고 하며 명훈이 와인 잔을 또 비웠다.
“마취에서 깨어난 엄마가 ‘다시는 네 얼굴 못 보는 줄 알았다. 너 같은 아들을 또 낳아야 하니까 내세에서도 네 아버지와 결혼할 거야’라고 하시며 활짝 웃으시더라. 참으로 끔찍한 농담을 하신다고 생각했지만, 엄마의 웃는 모습에 안심이 되었어. 엄마를 모시려고 집수리도 했는데…. 자리보전하고 누워서 애도 좀 먹이고 그러다가 가시지, 뭐가 그리 급하셨을까? 윤회하지 않을 거야.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겠지만 상관없어.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엄마의 아들이 되지는 않을 거야. 우리 엄마도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첫 월급으로 어머니 생활비를 보내드렸다며 기뻐하던 명훈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였던가? 엄마를 데리고 도망가고 싶은데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명훈이 주먹을 꼭 쥐었다. 어린 마음에도 명훈이 안타까웠다. 친구들이 명훈을 크레믈린이라고 부르며 재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를 이해했다. 명훈의 어머니가 남편과 살기를 고집하지 않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살겠다고 했기 때문에 명훈은 고향 집을 새로 짓기로 했다. 건축사인 동기동창에게 설계와 시공을 맡겼다. 명훈의 아버지가 인부들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공사가 시작되지 못했다. 그때 명훈은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고, 내가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와인 잔을 또 비운 명훈이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술 담배를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잘 마시네?”
“못 마신 게 아니라 안 마신 거야. 처자식이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면 안 되니까 열심히 돈을 벌었어. 그런데 우리 의진이는 하고 싶은 게 없대.”
노인들이나 다니는 뒷골목 이발소에서 단돈 오천 원에 머리를 깎을 정도로 자신에게는 가혹한 명훈이 아내와 딸에게 자동차를 사 주고 법인카드까지 주었다. 그때 나는 당장 카드를 회수하라고 잔소리했다. 지나치게 많은 돈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동기를 꺾을 뿐이다.
여자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입맛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명훈과 마지막으로 온 식당이 이곳이라고 하셨지요? 지금은 명훈을 안 만난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 집 일에 더는 끼어들기 싫어서요.”
여자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명훈 씨와 나눈 대화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건 가족에 관한 문제였어요. 어머니, 아버지, 아내, 딸, 지겨울 정도였죠. 나는 늘 이해하라거나, 다들 그렇다거나 하는 말로 달랬어요. 해결해 준적도 있었고요.”
“해결이라고 하셨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명훈 씨가 고향 집을 지을 때 제가 두 팔 걷고 나섰죠. 아버지가 집을 못 짓게 해서 허파가 뒤집어진다고 했거든요. 머리가 죽을 거 같이 아프다고….”
여자는 두통에서 명훈을 해방시키고 싶다는 단순한 동기로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어버이날 효도 여행을 보내드린 다음 집을 철거해 버리면 아버지가 어쩌겠는가? 공사기간 동안 모실 요양원부터 물색하자고 제안했고, 전국에 있는 시설이란 시설은 죄다 검색해서 몇 군데를 뽑았고 명훈과 함께 답사를 갔다. 충청도에 있는 요양원이었다. 어두워져서야 서울로 출발했고 여자는 깜박 잠이 들었다. 다 왔다는 말에 서둘러 내리고 보니 지하철역이었다.
“멀어져 가는 명훈 씨 자동차를 보며 그 자리에 오래오래 서 있었어요. 그런 사람인 줄 알았지만 그날은 서운했어요. 내 일이 아니잖아요? 자기 일로 먼 길을 다녀왔으니 당연히 집까지 데려다 줄 줄 알았죠.”
“그래서 친구들이 싫어해요. 약속시간에 늦으면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데 삼 분 늦었어, 이런 식이거든요. 그럴 땐 나도 정나미가 떨어져요.”
“지극히 사무적이죠. 하지만 집을 짓는 내내 결혼식을 앞둔 신랑처럼 들떠 있었어요. 이 사람은 정말 가족이 인생의 전부구나 생각했어요.”
명훈이 업무 보고 하듯 여자에게 공사 경과를 세세하게 전하고 살림살이와 이부자리를 장만하는 일까지 조언을 구했다는 말에 놀랐다. 새집에 엄마를 모셔 두고 돌아온 명훈을 만나러 여자가 명훈의 사무실에 갔을 때 장미 향이 가득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다고 한다. 무관심을 가장하며 슬쩍 살펴보았더니 리본에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라고 적혀 있더란다. 여자의 생일 이 지나간 지 여섯 달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날 “고맙소!”라는 단 한마디를 들었을 뿐이라며 여자가 쓸쓸하게 웃었다.
“제일 큰 실망을 맛보았던 건 집을 지은 후 처음 맞이한 설날이었어요. 명훈 씨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났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우리 엄마는 전생에 무슨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기에, 난방이 되지 않는 집에서 내복을 다섯 벌이나 입고 살아야 하느냐고 했어요.”
“난방이 안 되다뇨?”
“집의 소유권을 동생에게 넘기고 부모님을 모시게 하겠다더니 마누라 반대가 심해서 동생에게 집을 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명훈 씨 아버님은 보일러를 못 켜게 했고요.”
여자는 동생에게 집을 주고 부모님을 모시게 하라고 조언한 바 있었고 명훈은 꼭 그러겠노라고, 그래야겠다고 말해 놓고는 결국 마누라 말을 따랐던 것이다.
“저는 명훈 씨가 저를 이용한다고 느꼈어요.”
“녀석은 늘 가족에게 묶여 있었습니다.”
“저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은 거예요.”
“정말 서운했겠습니다.”
여자는 피클만 집어 먹었다. 내 피클 접시를 여자 앞으로 밀어 놓으며 며칠 전에 꾸었다는 이상한 꿈에 관해 물었다. 여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심리검사를 하자고 했을 때 명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양육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딸을 위해서 반드시 검사 받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환불해 줄 테니 이제 그만 오라는 말까지 하고 나서야 명훈이 볼펜을 집어 들었다. 검사 결과는 ‘거울상 이성질체’를 떠올리게 했다. 좌우가 바뀌기 때문에 실물과 거울에 비친 상은 온전하게 포갤 수 없다. 물리적·화학적 성질이 완전히 같은데도 불구하고 이성질체는 반대되는 효과를 낸다. 명훈의 경우 누구와 상호작용을 하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이 문제였다.
“딸이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며? 너는 가슴이 뜨겁도록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어?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사랑은 책임지는 거지. 돌보는 거고.”
“눈을 감아 봐.”
“또 점수 물어보려고?”
“글쎄, 그냥 감아.”
마지못한 듯 명훈이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해. 하나 두울 셋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는 거야. 그렇지, 그렇게. 사고나 이성이나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느껴 봐.”
나는 명훈에게 차갑다거나 아프다거나 하는, 그런 느낌을 상상하라고 말했다.
“느끼려고 하면서 마음을 그리는 거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뭔가가 떠오르면 보이는 대로 말해.”
“내가 보여. 군중 속에서 혼자 걷고 있어.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음, 방향성 없이, 정처 없이 걸어가.”
명훈이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 마음은 이동하면 안 돼. 가만히 머물러서 마음을 찾아봐. 뭐가 보여?”
“캄캄해. 음, 어둠 속에 빨간 장미가 있어. 어어, 장미가 점점 커져. 쑥쑥 자라나. 지붕을 뚫고 계속 위로 올라가. 재크의 콩나무처럼.”
명훈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보라고 하기도 전에 눈을 떴다.
“이게 도대체 뭐야?”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깊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마음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어. 이게 바로 우리가 다뤄야 할 주체야. 어떤 느낌인지 한 단어로 말해 봐.”
“몰라. 근데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
장미는 이성에 관한 관심과 성적인 에너지를 의미한다. 명훈이 뭉크의 그림을 골똘히 바라보던 장면이 생각났다. 아내에 대한 감정일 리는 없었다.
“혹시 마음에 둔 여자 있어?”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단 말이야?”
명훈이 내게 경멸의 눈초리를 던지더니 상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몇 가지 검사를 더 해야 하는데…. 내가 물어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가족이 전부인 명훈이었다. 어머니의 불행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그런 가장이 되지 않겠다고 이를 갈던 녀석이었다. 바람을 피운다고 하더라도 계획부터 세웠을 놈이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낮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놈이었다. 명훈에게 외도는 달성 불가능한 목표였다. 그런데도 명훈이 여자에게 보인 태도는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여자에게 자신의 전부를 드러낸 것으로 보였다. 왜 사는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무엇이 슬픈지, 시시콜콜 말했다는 거 아닌가? 사람들은 특히 남자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는다. 약점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명훈은 여자를 어떤 존재로 여긴 것일까? 엄마, 아내, 친구, 연인? 아니면 이 모두를 합한 존재? 정서적으로 교감하지 못하는 명훈의 문제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명훈의 아버지는 아들이 보내 주는 돈을 통장에 쌓아 두기만 했을 뿐, 아내를 잘 먹이지도 않았고 잘 입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죽자 통상적인 장례절차를 거부하며 자기 손으로 염습을 하고 선산에 직접 묻겠다며 아들과 싸웠다.
여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명훈의 행동에 어떤 변화를 느끼지 못했습니까? 아주 작은 변화라도 있었다면 모두 말씀해 주세요.”
“변화요? 글쎄요. 아, 이삼 년 전부터 나를 친구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목련이 활짝 핀 어느 저녁, 여자는 프랑스 식당에서 명훈을 만났다. 두 번째 와인 병이 비어갈 때쯤 명훈이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친구라고 해도 되겠지요? 친구니까 이름 불러도 되지요?”
여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친구라니, 이제 겨우. 친구도 아니었다면 그동안 어떤 관계였다는 말인가? 친구도 아닌 사람에게 가족 문제를 털어놓고 집안일에 끌어들였다는 말인가? 여자는 명훈을 영영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섭섭했지만 후련했고, 과도하게 얽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며칠 후 링크 하나만 달랑 걸려 있는 메일을 받았다. 웹툰이었다. ‘어린 시절 읽지 못했던 만화를 지금 읽는 건가?’ 생각하며 단숨에 읽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연을 반복하던 남녀가 운명적인 반쪽을 만난다는 순정만화였다. 독후감을 썼다. ‘지금이라도 좋은 남자를 찾아보라는 뜻이죠?’ 잠시 망설이다가 ‘역시 친구밖에 없다니까요’를 덧붙여서 보냈다. 회신은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다. 신음하듯 스모그 아래로 내려앉는 태양이 피보다 붉었다.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명훈이었다. 근처 카페에 와 있다고 했다. 일요일에 전화한 것도, 집까지 찾아온 것도 처음이었다.
명훈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출판사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이었다. 전면 통유리에는 만화 주인공들이 붙어 있었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는 줄 몰랐다고 말하자 명훈은 ‘이런 곳에 카페가 있다’고 대답했다. 테이블 네 개를 제외한 공간에는 서가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차를 다 마실 동안 명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명훈이 서가로 갔다. 꼭 사고 싶은 만화책이라도 있는 것처럼 열중해서 살피는 명훈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만화책 세 권을 빼든 명훈이 계산대로 갔다. “그 만화가 왜 좋은 건데요?” 하고 물었지만 명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쇼핑백을 건넨 명훈이 작별 인사도 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집까지 찾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 버리다니. 만화책은 왜 주고 갔을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머리 위에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에게 기대했던 삶이었나? 여자는 장례식 이후에 받은 명훈의 메일을 떠올렸다. 그래도 우리 엄마가 나와 관련해서는 행복했던 것 같다고 적혀 있었다. 전교 일 등인 내 성적표를 보실 때, 내 아들을 등에 업고 손자라며 자랑하실 때 엄마가 웃었다고….
“명훈 씨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만화책을 내게 주었을까요?”
여자는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싶다는 얼굴로 물었다.
“글쎄요, 위로가 필요했을 수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와는 다른 미래를 꿈꾼 것일 수도 있겠지요.”
여자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여자가 꾸었다는 꿈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손사래를 칠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한잔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차를 가지고 오지 말 걸 그랬나, 후회하며 병을 내려놓았다.
“주문량이 크게 늘어났을 때 명훈 씨가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어요. 이 식당이었죠.”
여자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명훈 씨는 왜 이 식당을 골랐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어요. 제품 스펙을 설명할 때처럼요. 밀을 껍질째 씻어서 말린 다음 그날그날 필요한 만큼만 제분기에 빻는다거나, 프랑스산 밀과 우리나라 앉은뱅이 밀을 적당히 섞어서 천연 효모로 발효시킨다거나 하는. 백구십도 정도의 중온에서 굽는 건 비타민 B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여자는 비타민 B에 대해 더 설명하려는 명훈을 제지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신선하고 맛있다는 말 아닌가. 음식을 정성스럽게 잘 만드는 식당이라고 하면 될 일인데 참 유별나다 싶었고, 심각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음식이 맛있었는지 묻는 통에 곤란했다며 웃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후 명훈은 내게 오지 않았다. 상담을 계속하겠다거나, 그만두겠다거나, 하는 의사 표시도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불쑥 명훈을 만나러 갔다. 명훈은 약속도 없이 들이닥친 나를 반기지 않았다. 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자신이 가진 심리적 문제에 대해 명훈에게 알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처자식을 학대하는 아버지가 싫었다며? 엄마 남편이라서 예를 다 했을 뿐 아버지로서는 의미가 없었다며? 아버지가 왜 그러시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 있어?”
아버지가 가진 심리적 문제에 관해 설명하고 치료를 받았더라면 어머님이 행복하게 사셨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너 역시 진단기준을 충족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있어.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치료해야 해.”
“어떻게 나를 아버지하고 같은 사람으로 치부할 수가 있어? 그런 말이 나와? 내가 처자식을 굶기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화부터 내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네가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상처를 많이 받았을 거야. 네가 아버지한테서 상처를 받은 것처럼.”
명훈과 같은 정서적 장애가 있는 사람은 감정적인 교류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상처를 준다. 자신의 상처와 같은 상처를 상대에게 주었을 거고, 상대방에게 준 상처가 다시 자신을 겨누는 칼날이 되게 했을 거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그리했을 것이다. 명훈은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성급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여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명훈의 휑했던 눈빛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여자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된 바로 그 순간,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모든 감정이 순식간에 소진되었을 수도 있다.
“명훈이 서 이사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고 생각하신 적 없습니까?”
“글쎄요. 그 사람은 가족밖에 몰랐으니까요. 나는 결코 편입될 수 없는 가족 말이예요. 그래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메일을 보냈어요.”
“명훈에게는 심리적인 문제, 말하자면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뢰나 헌신을 사랑과 혼동하기도 했고요. 어머니가 자신의 방식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걸 몰랐죠. 명훈은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여자가 동의했다.
“명훈이 세상과 소통한 유일한 통로는 서 이사님이었습니다. 서 이사님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중요한 결정은 아내가 하잖아요? 그건 소통 아닌가요?”
“소통이라기보다는 져 주는 거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여자는 충격을 받은 듯도 보이고, 이미 알고 있는 듯도 보였다.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서 이사님과 헤어진 것이 세상을 다 잃은 것만큼 충격을 주었을 겁니다.”
“저는 확신이 필요했던 거 같아요.”
“명훈이를 빨리 찾아야 됩니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할까요?”
불안한 상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로 여자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명훈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걱정하고 있으니 메시지를 읽는 즉시 전화하기 바란다는 문자를 쓰고 있을 때 통화음이 울렸다. 최 대리였다.
“여기저기 다 수소문해봤지만 만났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혹시 따님에게 가셨나 해서 연락 중인데 통화가 안 돼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자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훈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최 대리는 통화 중이었다. 탁자 위에 명훈의 노트북이 있었다. 엔터 키를 부르자 화면이 밝아졌다. 푸른 바다 위에 돛단배가 떠 있었다. 흰색 글자가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을 땐 전신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날이 그대들을 상처받게 할지라도….
최 대리가 “따님이예요.”라며 내게 수화기를 건넸다. 명훈은 약속도 없이 딸의 기숙사로 찾아간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를 꼬옥 끌어안았고, 몸을 빼는 아이 뺨을 쓰다듬으며 오래오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만 가시라는 딸의 채근을 받고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고개를 돌리니 아빠가 계속 저를 보고 계셨어요. 그때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예요?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여자가 아,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꿈이, 꿈이 정말 이상했어요. 명훈 씨와 마주 보고 서 있었어요. 명훈 씨 왼쪽 눈, 네, 왼쪽 눈이었어요. 눈물샘 옆으로 바늘이 들어가고 있었어요. 바늘귀부터 들어가기 시작해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바늘이 삼분의 이쯤 들어갔을 때, 너무 무서워서 숨도 쉴 수 없었지만 꾹 참고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바늘을 꼭 잡았어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빼냈는데 눈동자가 바늘에 꽂혀 있었어요. 길게 이어진 근육이 피에 젖어 불그스름했어요. 가위에 눌리며 잠에서 깼어요.”
넘어진 의자를 세우는 내 손이 떨렸다. 여자의 휴대폰이 딩동하고 울었다. 여자가 황급히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문자를 확인한 여자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하얘졌다. 여자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다시는 나를 보지 않아도 되오.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명훈이 보낸 메시지였다.
(문학나무, 2019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