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공기 속에는 클로버 향 같은 병원 특유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침대 난간을 잡고 종종걸음을 치는 윤주를 보는 경민의 심경이 복잡했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곳에 윤주의 손이 있었지만 얼마 안 되는 그 간격이 무한히 멀게 느껴져 차마 윤주의 손을 잡지 못했다. 천장의 불빛이 휙휙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침대를 밀던 조무원이 수술실 입구의 자동문 앞에서 멈춰 섰다. 경민은 윤주에게 그만 가 보라고 손짓했다. 봉직의인 윤주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경민은 여기서 그만 윤주를 보내고 싶었다. 경민의 어깨를 다독이는 윤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윤주의 눈동자에 비친 경민도 흔들렸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경민의 머릿속은 망연하기만 했다. 양쪽으로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침대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중앙에서 만나는 두 짝의 미닫이 유리문에는 통제구역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제와 구가 천천히 나타났고 통과 역이 뒤를 이었다. 붉은 색 네 글자가 만든 경계는 성벽보다 견고하고 냉엄했다.
대기실에는 먼저 들어온 침대가 있었다. 서너 살 된 아기가 엄마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싫어, 엄마 싫어.”를 외치며 계속 울었다. 간호사가 마취 주사를 놓을 때까지 아기를 안고 있으라고 엄마에게 말했다. 침대가 또 들어왔다. 반백의 할머니가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침대 난간을 꽉 붙잡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며 간호사가 할머니의 손을 어루만졌다. 걱정 마세요. 경민 이 환자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연히, 예정에 없이, 귀신도 모르게, 감쪽같이 다가오는 게 고통이란 걸 알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걱정 마세요, 입 밖으로 터져 나가지 못한 말이 심연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
경민은 호흡을 고른 다음 메스를 절개 위치에 대고 최적의 압력을 가늠하며 길게 그었다. 저항을 잃은 피부 위로 칼날이 소리 없이 지나갔다. 작은 핏방울들로 얼룩진 하얀 피부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는 미리 알 수 없다. X-Ray도, CT도, MRI도 보여주지 않는다. 지금 수술하는 부위는 큰 혈관과 신경이 지나가는 곳이라서 어젯밤 늦게까지 영상자료를 보며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했다. 절개 부위는 작을수록 좋고 수술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최초 절개 위치를 잘못 정하면 이후의 모든 스텝이 꼬인다. 절개 범위가 너무 작으면 이상 조직을 정확하게 떼 내기 어렵고 지나치게 크면 피부 이식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절개 범위를 결정하는 찰나의 칼끝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과 약간의 망설임이 배어 있다. 수술실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집도의다.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환자의 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했다지만, 마취된 채 누워 있는 환자를 볼 때마다 경민은 무한에 가까운 책임을 느꼈다.
핏방울이 절개선을 붉게 물들이자 어시스턴트가 재빨리 거즈로 닦고 석션으로 시야를 확보해 준다. 수술실에는 질식할 것 같은 기묘한 정적만 흐른다. 칼을 든 집도의도 어시스턴트도 간호사도 말이 없다. 환자 감시 장비만이 과묵한 마취과 선생을 상대로 재잘거릴 뿐이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 놓고 수술하는 의사는 이런 어색한 침묵이 싫은 것이리라. 치지직 거리는 낮은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살 타는 냄새가 수술실 안에 퍼졌다.
수술 부위가 드러나는 순간 경민의 잡념이 사라졌다. 경민은 두꺼운 근육을 힘껏 젖히고 조심스럽게 조직들을 하나씩 박리하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인체는 해부학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일률적이지 않다. 혈관의 위치나 장기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얼마 전 어느 대학병원에서 두 환자의 수술 부위가 뒤바뀌는 어이없는 사고가 있었다. 갑상선 환자의 위를 떼 내고 위암 환자의 갑상선을 제거했다. 집도의가 시뮬레이션 한 번 하지 않은 건 물론이고 영상자료조차 확인하지 않아서 일어난 사고라고 믿기에 경민은 서너 번 이상 반복해서 시뮬레이션한다.
경민에게 있어 수술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머리로는 시뮬레이션 과정을 그리고, 눈으로는 환부를 보고, 손끝으로는 조직을 느끼면서 조심조심 가위로 자르고 소각기로 지진다. 원칙이나 매뉴얼, 문자로 표기된 그 어떤 것도 수술실에서는 의미가 없다. 살과 살이 부딪히고 피가 튀는 수술실에서는 본능 속에 녹아든 경험만이 길잡이가 된다. 육감이 오케이 신호를 보내야 장갑 너머로 만져지는 환자의 조직을 과감하게 잘라낼 수 있다. 짧은 순간 경민은 언제나 이성과 육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경민의 이성은 아직 육감을 신뢰하지 못하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수술을 집도해야 풀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듯 담담하게 수술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경민이 아직 수술실에 있다면 간호사가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윤주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깐 볼 수 있어요?”
“식당으로 가려던 참인데.”
“방에서 기다릴게요.”
윤주는 경민이 또 점심을 거르고 수술했구나 생각하니 짠했다.
“무슨 일이야?”
경민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FD(섬유이형성증, Fibrous Dysplasia) 환자 때문에 왔어요.”
“고작 FD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나 배고파. 난 또 무슨 심각한 일이 있는 줄 알았지. 다음 수술까지 삼십 분도 안 남았어. 나중에 얘기하자.”
“잠시만요. 나도 바빠요. FD가 이상하다니까요? 녹은 거 같아요. 드물긴 하지만 악성 변이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잖아요. 우리 병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던데. 환자가 호소한 다른 증상은 없어요? 절단해야 할지도 몰라요.”
“환자와 대면하지 않는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냐? 절단이라니? 절단하면 깨끗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함부로 그럴 수는 없어. 회복도 훨씬 어렵겠지만 환자 마음 생각해 봤어? 정신을 차려 보니 다리가 없다고 해 봐.”
윤주는 짜증이 났다. 산더미 같이 밀려 있는 판독을 미루고 뛰어와서 기다렸는데 말하는 품새라니. 임상 의사들은 늘 이런 식이다. 영상의학과 의사들은 환자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경민의 환자라서 더 세심하게 보았건만.
“그래서요? 종양이 여기저기 전이되면 죽을 수도 있고 소송을 당할 수도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데? 케이스 리포트가 있기는 해?”
경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도 안 되지만 보고는 많아요.”
“환자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
경민은 윤주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식당으로 뛰어가 버렸다.
방으로 돌아온 윤주는 FD 환자의 영상을 다시 띄웠다. 경민은 환자의 다리를 살리려고 하지만 만에 하나 전이될 위험이 있다면 미리 잘라야 한다.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나 부담을 안고 갈 이유가 없다. 이성적인 판단만이 진단과 치료에 도움이 된다.
62세 남자, 양성종양 환자의 추적검사 영상이다. 지난번에 찍은 사진보다 투과성이 높아졌다. 간유리 음영처럼 불투명했던 곳이 뻥 뚫린 것처럼 보였다. FD가 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변할 수 있는데 괜히 오버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근거를 댈 수 없는 어떤 느낌일 뿐이지만 께름칙했다. 주치의인 경민과 함께 사진을 보면 느낌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만 낭비한 셈이었다.
바쁘기로 치자면 윤주도 경민 못지않았다. 다리가 붓는 걸 예방하기 위해 하지 정맥류 환자들이 신는 압박 스타킹을 신고, 거의 매일 어깨에 파스를 붙인다. 느긋하게 커피 한잔 마시지 못하면서도 번번이 정형외과 병동으로 달려가는 건 경민의 시간을 절약해 주기 위해서다. 경민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혹사하면서 일한다. 지나치게 세심하고 지나치게 숙고한다. 유능한 칼잡이에 대한 염원과 가치 있고 유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린 사람처럼.
윤주가 인턴이었을 때 경민은 레지던트 3년 차였다. 작은 실수에도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환자들 때문에 의욕상실에 의기소침까지 겹쳐 의사가 되는 걸 포기하려고 했다. 그때 경민이 환자들과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영상의학과를 권했다. 냉정하고 치밀하니 판독을 잘할 거라면서. 경민의 조언을 받아들인 건 그의 말과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진지했고 누구에게나 진심이었다. 환자들에겐 특히 그랬다. 공감적 이해가 최고 수준의 이해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독립적인 개체로서 자신의 주체성도 유지해야 한다. 마음은 나누되 주관은 잃지 말아야 하는데 경민은 자주 환자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경민은 환자의 다리를 자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했다. 이런 종류의 불안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야말로 막연한 감일 뿐이다. 윤주는 환자보다 경민이 더 걱정되었다. 전투가 반복되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 수술의 성공과 실패도 치료에 상존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고의로 환자를 사경에 몰아넣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수술에 실패한 경민이 자책하며 괴로워할 게 뻔한 이상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는 없었다.
윤주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맞선을 보라고 다그칠 모양이다. 몇 달 후면 서른네 살이 된다. 결혼은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니라는 사실을 엄마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것을 한다면 경민과 하고 싶지만, 엄마가 반대할 게 뻔했다. 돈 잘 버는 인기과 의사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니까. 윤주는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엄마는 사주쟁이가 했다는 말을 틈만 나면 들려주었다. 네가 남편을 비단 방석에 앉혀 놓고 먹이고 입히고 할 팔자래. 돈 많은 집 아들하고 결혼시킨 다음 네 이름으로 병원을 지으래. 평생 남편을 먹이고 입혀야 한다면, 그것도 비단 방석에 앉혀 두고 그래야 한다면 결혼하지 말라고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여자 사주가 너무 세서 집에 들어앉아 살림할 팔자는 아니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면 부귀가 따르겠다고 했다면서 엄마는 의대를 고집했다.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사주쟁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전업주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성적에 맞춰 의대에 갔다는 데 있었다.
실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성적도 탑 쓰리 안에 들었다. 그런데 피 냄새를 맡는 순간 욕지기가 났다. 아픈 사람들을 매일 보고 있자니 미칠 거 같았다. 수능을 다시 봐서 다른 전공을 택할까 고민도 했다. 영상의학과로 가라고 조언하던 경민의 진솔한 눈빛 덕분에 고문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컴퓨터의 채팅방과 병원 내에서만 쓰는 메신저가 쉴 새 없이 딩동거렸다. 빨리 판독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윤주는 영상을 넘기며 빠르게 소견을 쓰기 시작했다.
경민은 FD 환자를 어떻게 수술할지 고심했다. 마취에서 깨어나 수술이 잘 되었구나, 하고 안도하는 순간 한쪽 다리가 없어진 것을 알면 환자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손가락 하나도 아니고, 발가락 하나도 아닌, 다리 하나가 없어지는 일이다. 사전 동의를 받고 다리를 자른다면? 그러면 환자는 냉정하게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윤주는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잘 긁어내기만 하면 재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잘라내는 것보다 나을 테지. FD가 육종성 변형을 해서 암으로 전이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윤주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윤주가 느낌이 좋지 않다고 말하면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환자를 빨리 외래로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채팅방의 알림음이 울렸다. 윤주였다.
-언제 퇴근해요? 나는 끝났는데. 응급 수술 있어요?
-아니, 자료 좀 찾아보려고.
-FD 환자 때문에? 내가 갈까요?
-그래.
경민의 방으로 온 윤주는 쇼핑백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꺼냈다.
“식당에 안 내려왔죠? 제발 밥 좀 챙겨 먹으면서 일해요. 월급 더 주는 거도 아닌데.”
“그러게. 배식 시간 맞춰서 식당 가기도 쉽지 않네.”
경민이 샌드위치를 다 먹기도 전에 코드 블루 방송이 나왔다. 정형외과 병동이었다.
“갔다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바쁘면 먼저 가도 돼.”
황급히 달려가는 경민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환자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일었다. 자투리 시간에도 환자들의 영상만 들여다보지 않는가. 환자를 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럴 때마다 윤주의 가슴은 질투로 뜨거워졌다. 영상의학과를 권하던 순간의 진심 어린 시선을 그 이후에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누구의 사진을 보고 있었을까? 엔터 키를 눌렀다. 화면이 밝아지며 대퇴골 사진이 나타났다. 또렷하지는 않지만 종양 같았다. 내일 수술할 환자인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왜 담당 의사의 이름이 환자 성명란에 적혀 있을까? 보안이 필요한 환자인가? 성명 아래 적혀 있는 생년월일과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틀림없는 경민의 인적 사항이었다.
해부학 실습 첫 시간에 실습대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시신들을 보았을 때처럼 몸이 떨렸다. 누가 경민의 사진을 판독했을까? 벌떡 일어난 윤주는 숨이 턱에 차도록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윤주의 모니터는 경민의 모니터와 다르다. 경민이 일반적인 모니터를 쓰는 데 비해 윤주는 하루살이 배에 잡힌 주름조차 큼지막하게 보이는 해상도가 뛰어난 모니터를 쓴다. 컴퓨터를 켜고 경민의 영상을 띄웠다.
두 달쯤 전이었나? 경민이 한강 하구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며 절뚝거리고 걸었다. 근처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사진을 왜 CD에 담아오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경민은 자기가 봤을 때도 별문제 없었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왜 다시 찍었을까? 추적검사? 아니면 통증이 있어서?
윤주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경민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기분 나쁜 사진이었다. 뭔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뚜렷이 잡히지 않는 사진과 가끔 마주치는데 경민의 사진이 그랬다. 이런 사진은 대부분 예후가 좋지 않았다. FD 환자의 다리를 자르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나? 놀라움이 가시자 경민이 숨겼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갑자기 엄마 말이 떠올랐다. 남편을 먹이고 입힐 팔자라고 했던가. 경민과 결혼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인지 누구하고 결혼하든 그렇게 된다는 말인지 새삼 궁금했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 속에도 엄마는 정초만 되면 온 가족의 운세를 보러 용하다는 사주쟁이를 찾아다녔다. 지나친 엄마의 믿음에 반감을 느끼면서도 사람에게는 정해진 운명이 있고, 사주팔자가 운명을 해석하는 방정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 하고 있었다. 언젠가 경민에게 태어난 시간을 물어보았을 때 그는 “사주 보려고? 우리 병원 최고 두뇌 중 한 사람인 윤주 선생이 그런 걸 믿는단 말이야?” 라며 피식 웃었다.
경민의 사진을 보는 순간 윤주는 엄마의 사주 타령이 헛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런 순간에 사주쟁이의 말을 떠올리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지만, 경민의 운명을 알고 싶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특별히 나쁠 게 없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테고 큰 변고가 생길 운이라고 해도 미리 아는 게 낫다. 메신저로 경민의 생년월일시를 엄마에게 보냈다. 친구가 사귀는 남자니까 상세하게 봐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윤주는 주치의 허락 없이 환자에게 개별 연락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FD 환자에게 전화해서 MRI를 찍어보자고 말했다. 왜 여자 선생님이 전화하셨는지 환자가 물었다. 윤주는 적당히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경민은 외래 진료실에서 FD 환자를 맞았다. 사진 판독 결과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악성변이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밝혔다. 종양이 더 커질 수도 있고 전이될 수도 있으니 빨리 수술해야 하고, 만에 하나 다리를 자를 수도 있다는 말도 조심스럽게 했다.
“다리를 자를 수도 있다니! 무슨 그런 엄청난 말을 하십니까? 암은 아니라면서요? 말씀이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닙니까?”
환자는 아주 낮은 확률 때문에 그런 심각한 수술을 받을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며칠 전에는 여의사가 전화해서 MRI를 찍자고 하더니만 이제는 다리를 자르자고 하는 거냐며 화를 냈다. MRI를 찍으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환자가 말하는 여의사는 윤주일 것이다. 불같이 급한 성격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이 환자에게 전화하다니….
어떻게 설득하지? 성심을 다하는 길밖에 없었다. ‘다리 절단’은 만약의 경우일 뿐이며 늦어지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환자의 눈에 공포가 스몄다.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당장 수술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빡빡한 수술방 일정이었다. 이 주일 뒤까지 꽉 차 있었다. 취소되는 수술방이 나오면 꼭 내게 달라고 매달린 끝에 겨우 방을 잡을 수 있었다.
경민은 마취된 채 평온하게 누워 있는 FD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환자와 경민과의 거리는 대략 10cm. 결정을 위한 거리치고는 너무 짧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지만 다리를 자르는 것이 좋겠다는 윤주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리를 잘라내고 보조기를 채우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FD가 육종성 변형을 했다는 정확한 근거 없이 수술을 크게 벌리면 심평원에서 무슨 트집이든 잡을 확률이 높다. 치료비 삭감이나 환수를 당할지도 모른다.
열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며 메스로 살을 갈랐다. 10cm의 거리가 소멸하는 바로 그 순간 경민은 환자와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근육을 젖히자 환부의 뼈가 드러났다. 종양을 덮고 있는 뼈에 드릴로 구멍을 뚫었다. 종양만 깨끗하게 제거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조심히 잉여 조직을 들어낸 다음 몇 부분을 떼어내 동결절편 검사를 보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악성이라고 나오면? 악성 가능성과 근치적 수술에 관해 최선을 다해 설명했지만 환자는 종양만 적출하기를 바라고 있다. 악성이라서 다리를 잘라냈는데 환자가 납득 하지 못하면? 수술실을 농밀하게 채운 조바심의 시간이 한없이 길게 이어졌다. 삑-삑-삑-삑, 환자 감시 장치의 규칙적인 소리만이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흐르는 시간이 어디에 닿을지, 닿은 곳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음성이라는 결과가 수술실을 짓누르던 무거운 적요를 무너뜨렸다. 절개 부위를 봉합하고 수술을 끝냈다. 긴장이 풀리며 힘이 쭉 빠졌다. 더 어렵고 힘든 수술을 했을 때도 이렇게 기력이 소진되지는 않았다. 누워서 쉬고 싶었다.
윤주는 초조함을 달래며 경민의 방으로 갔다.
“수술은? 긁어내기만 했어요?”
“다행히 음성이었어. 최대한 꼼꼼하게 긁어냈으니 괜찮을 거야.”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하겠지만 종양이 남아 있으면 재발할 텐데. 차라리 절제하고 인공관절을 심는 게 낫지 않았겠어요?”
“음, 재발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아니기를 바라야지. 일단 다리는 살렸어.”
자신 없는 목소리로 경민이 말했다.
순간 윤주는 불안이 해무처럼 다가온다고 느꼈다. 수술 자체를 좋아하는 경민이었다. 와이셔츠 단추 구멍에 실을 매달고 쉴 새 없이 타이 연습을 했고, 왼손도 오른손처럼 잘 써야 한다면서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했다. 손수건을 잘라서 수술 바늘과 봉합사로 오리 인형과 곰 인형을 만들어 준 적도 있었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그는 늘 자신만만했다. 말은 ‘그냥’이라고 하면서도 씩 웃으면 수술이 잘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오늘은 웃지 않았다.
회진을 돌 때마다 경민은 FD 환자를 제일 먼저 보러 갔다.
무통주사로 불리는 PCA를 제거하고 이틀이 지났을 때 환자가 고통을 호소했다.
“수술도 잘 되었고, 검사 결과도 음성이었으니 걱정 마세요.”
“별일 없겠죠? 그런데 이상하게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니까요.”
경민은 진통제 양을 조금 더 늘리라고 지시했다. 수술 후 통증이니 점차 나아지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환자 곁을 시원하게 떠날 수 없었다. 혹시 다른 게 더 있다면? 머릿속으로 수술 과정을 다시 밟아 보았다. 살갗을 찢고, 근육을 젖히고, 뼈에 구멍을 뚫고, 종양을 제거하던 모든 과정을 되새겼다. 완벽했다. 공연한 걱정이겠거니 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서늘했다.
“혹시 이전에 방사선 치료받은 적 있나요?”
“아, 발가락에 흑색종인가 하는 게 있어서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습니다.”
“네?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지금에야 이런 말을 듣다니. 방사선 치료는 육종성 변형의 큰 위험 인자 중 하나다. 회진을 마치자마자 경민은 FD 환자의 차트를 꼼꼼하게 살폈다. 초진부터 지금까지 어디에도 방사선 치료에 대한 환자의 진술은 없었다.
최신 저널을 찾아보았다. 전체 FD의 사 분의 삼을 차지하는 단발골성타입은 육종성 변형 가능성이 아주 드물다고 나와 있었다. 괜찮을 거야. 경민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이 환자의 경과가 좋으면 자신도 수술대에 누울 생각이었다. 자신의 다리 역시 미룰수록 수술이 커진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 다리 살리자고 환자 다리가 잘리든 말든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경민이 좋아하는 티베트 속담이었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거야. 괜찮을 거야. 별일 없을 거야. 경민은 마음속으로 낯선 나라 속담을 수없이 되뇌었다.
윤주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엄마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가 사귄다는 남자 집 부자야?”
“아니 왜?”
“당장 헤어지라고 해. 올해 운세가 엄청 안 좋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큰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고…, 하여튼 거의 죽을 운이래.”
“내가 먹이고 입히고 하면 되지 뭐. 내가 그럴 팔자라며?”
“뭐? 네가 사귀는 거야? 어쩐지 수상하더라. 바른대로 말해. 뭐 하는 사람이야? 어떤 사이야?”
윤주는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얘기 좀 하자고 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이 남자 올해 운이 도끼가 여린 나무를 찍는 형국이래. 문 좀 열어 봐 윤주야. 얘기 좀 하자니까? 문 좀 열어 어서. 하여간 그 남자 절대 안 돼.”
기분 나빴던 경민의 사진이 떠올랐다. 예후가 좋지 않았던 환자들 생각도 났다. 골육종 같은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악성이라면 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 경민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어디예요? 할 말 있어요. 카톡을 보냈다. 물음표가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돌아서서 우는 이모티콘도 보냈다. 경민은 읽지 않았다.
꿈자리가 어지러웠다. 높은 축대 위에 길이 있었다. 축대 아래로 흐르는 개천물은 거울처럼 맑았고 꽤 깊어 보였다. 저 앞에 개천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아래를 보았다.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투명한 물속 1m 정도 깊이에 경민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경민과 함께 길 위에 있었다. 축 늘어진 경민의 입에 숨을 불어 넣고, 하나, 둘, 셋 세며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다시 숨을 불어넣고….
가위에 눌려 잠에서 깼다. 온몸이 축축했다. 관자놀이가 쾅쾅 울렸고 뒷머리는 조여들었다. 윤주는 경민이 회진을 돌기 전에 만나러 갈 작정이었지만 일찍 출근하지 못했다.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리며 커피부터 마셨다. 블랙을 마시던 평소와 달리 시럽을 듬뿍 넣었다. 입맛이 써서 그런지 단맛은 기분 나쁜 뒷맛만 남겼다. 응급으로 들어오는 판독 요청이 줄을 이었다. 퇴근 무렵에는 눈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고 미간 주위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서둘러 경민의 방으로 갔다. 경민은 한 손으로 이마를 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마트료시카 속 마지막 인형처럼 뒷모습이 한없이 작고 쓸쓸해 보였다. 거의 죽을 운이니 올해를 잘 넘겨야 한다던 엄마 말이 떠올랐다.
윤주가 책상을 살짝 두드렸다. 경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윤주 뒤의 출입문을 향하고 있었다. 지독한 무기력함에 정복당한 듯한 헛헛한 눈빛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닝스러워 가슴이 찢어질 거 같았다. 윤주는 기분이 어떠냐, 피곤하냐 등의 말은 생략하고 용건만 말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다리 사진 봤어요.”
경민은 언제 혹은 어떻게? 라고 묻지 않았고 윤주와 시선을 맞추지도 않았다.
“어쩔 건데요? MRI는 왜 안 찍어요?”
“내 FD 환자는 어쩌고?”
“할 수 없죠. 그 사람이 방사선 치료받은 사실을 미리 말했다면 악성으로 변이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적절한 치료법을 찾았겠죠. 그건 그 사람 잘못이잖아요.”
“의사인 내가 물었어야지. 전이되면 죽을지도 몰라.”
“경민 씨 올해 큰 수술할 운이래요. 엄마가 그랬어요.”
“운? 그럼 FD 환자는 죽을 운인 의사한테 수술받게 되었으니 완전 죽을 운이라는 거네.”
그는 왜 억지를 부릴까? 여느 환자들처럼 자신의 병을 인정하기 싫어서 피하려고 하나?
“모든 게 운명이라면 인간이 노력할 필요가 없잖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인간이 생겨나는 과정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엄마와 아버지의 유전자가 운명적으로 꼬인 걸까? 아니면 우연히 꼬인 걸까? 누구나 예쁘고, 영리하고,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길 바랄 텐데 세 가지를 다 갖춘 인간은 얼마 안 되잖아. 그러니 우연히 염기서열이 그렇게 배열된 거라고 봐야지. 존재 자체가 우연의 산물인데 사주팔자 같은 걸 따른다는 게 말이 돼?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선택이 있을 뿐이야.”
“엄마가 그랬어요. 사주팔자를 보는 건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를 피하고 경계하기 위해서라고요.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있으면 물가에 안 가면 되잖아요. 필요충분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피하기 어렵지만 둘 중 하나일 경우에는 노력에 따라 피할 수 있댔어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허황한 거라면 진작에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흰옷을 입은 채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경민의 모습이 떠오르며 윤주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어쩌라고? 어쩌자는 건데?”
“선택이 있을 뿐이라면서요? 당장 MRI 찍어요. 작은 수술로 큰 수술을 막을 거예요. 선택도 내가 하고 결정도 내가 해요.”
윤주가 경민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경민은 저항할 새도 없이 윤주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를 탔다. 촬영실로 내려가는 동안 윤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민은 촬영을 기다리는 내내 선택이라는 단어에 골몰했다. 위이잉 소리와 함께 기계가 돌아갔다.
윤주의 소견으로는 골육종 초기였다. 한쪽 다리가 잘린 경민의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반드시 경민을 설득해야 했다. 수술하지 않겠다고 계속 버티면? 강제로라도 수술실로 끌고 가겠다고 결심했다.
“골육종이에요. 당장 수술해야 해요. 다리를 살리려면 잠시도 미뤄서는 안 돼요.”
윤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맡은 환자들은 어쩌고? 나를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본 거야?”
“나는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내가 원해요. 당장 수술받기를 원한다고요. 그 FD 환자가 자기 자신보다, 그리고 나보다 더 중요해요? 정말 그렇다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교수님께 당장 수술해 달라고 말할 거예요. 수술하고 그 환자는 다른 선생님께 넘겨요.”
경민에게 인공호흡을 하던 꿈 장면이 또 떠올랐다. 윤주의 이성이 냉정하게 대처하라고 다그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로만 경민을 대해야 한다. 그래야 그를 살릴 수 있다.
“수술하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거예요.”
윤주는 또박또박 한 음절 한 음절 끊어서 분명하게 발음했다. 업어치기로 경민을 패대기치고 싶었지만, 말을 하는 순간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해졌다. 다리 하나가 없는 경민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자기 다리를 잃을지 모르는 순간에도 환자 다리만 생각하는 경민을 끝까지 보듬을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지금은 당신 자신만 생각해요. 자기 자신도 못 돌보는 의사가 무슨 의사예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쩌면 내가 경민씨를 죽일지도 몰라요.”
윤주는 그를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단호하게 얘기했다.
윤주가 너무 조용하게, 차분하고 침착하게 말했기 때문에 경민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죽음의 얼굴도 지금 윤주의 얼굴처럼 차갑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주가 교수님께 말할 것이고, 응급으로 수술방을 잡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도망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윤주가 소리를 지르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눈물을 보였다면 오히려 거부하기 쉬웠을 것이다. 야멸차고 쌀쌀한 윤주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
경민은 수술장의 형광등이 직사각형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천장은 으레 흰색이겠거니 했는데 누워서 보니 연한 푸른색이었다.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것인지 한가운데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이름 모를 만화 캐릭터가 붙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수술장은 부산했고 친숙한 얼굴들이 착실히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익숙한 공간이었고 익숙한 사람들이었지만 조금도 편안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소풍 길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을 놓쳐버렸을 때처럼 외롭고 두려웠다.
마취과 선생님이 밝고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잘 될 겁니다.”
경민은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들이 낯설었다. 마스크 너머 있을 그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간호사가 낭랑한 목소리로 환자 확인을 시작했다. 저 마스크 아래서 그녀는 웃고 있을까? 혹시 나를 비웃고 있는 건 아닐까? 담요를 덮었는데도 추웠다. 마취과 선생이 거꾸로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치아 흔들리는 거 없어요?”
경민의 성대는 밖으로 소리를 내보내지 못했다. 내가 깊은 잠에 빠져들면 저들은 내 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윤주는? 내 다리는 어찌 되는 걸까? 마취에서 무사히 깰 수 있을까? 마취에서 깬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로서 존재할까?
수술을 집도할 김 교수가 시작하자고 말했다.
“자, 편하게 열까지 세어 보세요.”
마취과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소독된 장갑을 낀 김 교수가 양팔을 니은 자로 들고 서서 경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냉정한 눈빛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경민의 다리까지, 그의 인생에서 경민의 인생까지는 고작 10 Cm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가 삶과 죽음의 거리만큼 멀어질 수도 있었다.
김 교수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졌다. 마취과 선생인 듯도 하고, 윤주인 듯도 했다. 변검을 공연하는 배우의 가면처럼 얼굴이 계속 바뀌었다. 아니, 저건? 내 얼굴인데? 경민은 불안했고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다리를 잘라도 좋다는 서약을 했을까?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걱정 마세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알지 못하는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문학나무, 2020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