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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순 Dec 22. 2022

절대 지지 말 것.


호주에서 쓰는 첫 일기. 이곳에 도착한 지 대충 4일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오게 됐을까. 사실 어쩌다라는 말은 꼭 계획에 없던 우연과도 같은 말이라 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호주에 오는 것을 꽤 오랫동안 바라왔다. 그때의 나에게 호주란 ‘내가 가진 우울과 불안은 모두 달아나고, 찬란한 미래만이 날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바라온 호주에 온 지금의 나는 나의 예상처럼 더 이상 우울해하지 않고 찬란한 순간들 속에서 살고 있는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완벽한 유토피아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자주 우울하고 종종 불안하다. 물론 매 순간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 보는 풍경에 환호하기도 하고 내일은 여기에, 그다음 날엔 저기에 가자며 기대에 부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들에도 껌처럼 달라붙어있는 지겨운 우울들. 친구와 함께 웃다가도 한숨을 내쉬고, 내 주위의 모든 것에 감탄하다가도 뒤돌아서면 심장이 저릿하다.



 공간이 바뀐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바보 같게도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했고, 내 활기찬 미래의 모든 시작은 이곳일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들은 내 오만방자했던 확신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나를 장악하려 들었고, 나는 여전히 불안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감정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가 없었다. 한국을 떠난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그 하찮은 허무맹랑함에 웃음이 난다.



 그렇게 기대에 대한 실망감은 무력감으로 다가왔다. ‘호주에만 오면 내 마음이 깨끗해질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도 힘든 마음이 든다면 나는 도대체가 괜찮아질 수가 있는 사람일까?’하는 마음이 나를 자꾸만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역시 기대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드는 찰나에 그 기대감으로 버텨왔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래. 호주에 가면 다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버텨보자.’라고 스스로 되뇌던 그때에 이 문장은 텅 빈 삶에서 가까스로 잡은 지푸라기였으며, 한 줄기의 빛이었다.



 어쩌면 기대라는 것은 현재만을 위한 것이 아닐까? 기대에 부흥하는 미래를 맞은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지만, 기대하는 그 순간만큼은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실망했을지언정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기대로 살아남을 수 있던 날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다가온대도 나는 기대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깜깜한 세상에서 내일을 기대함으로써 나를 지켜나갈 것이다. 설령 그게 썩은 동아줄이래도, 허무맹랑한 기대일지라도 그것이 당장의 나를 살릴 수 있다면 양손에 꼭 움켜쥐고 끝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우울은 어김없이 나를 찾아올 것이고 불안도 늘 함께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감정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멋진 풍경을 끊임없이 찾아다닐 것이고, 글을 쓸 것이고, 유머를 잃지 않을 것이며, 나를 치장할 것이고, 좋은 음악에 빠져 있을 것이다. 설령 감정에 짓눌리더라도 굴복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좋아할 것이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목표를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감흥을 잃지 않으며 살고 싶다. 나쁜 감정이 내 숨통을 조여와도 살아서 아주 생생하게, 마치 살갗에 닿은 듯 예민하게 느낄 것이다. 감정에 무뎌지는 것은 나답지 않은 일이다. 숨 쉬듯 웃고, 가끔 울며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볼 것이다. 우울해도 삶을 버리고 싶지 않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하루하루는 똑같더라도 다음 달에는 조금 더 나아진 내가 되고 싶다.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아서 기대하기를 멈추지 않으며(혹여 실망하게 된대도) 내 삶을 계속 영위할 것이다. 빛나는 지푸라기를 늘 손에 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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