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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순 Jan 29. 2023

라일락의 꽃말은 그리움이 아닌 추억.

 며칠 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 있었다. 저녁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온 세상의 향기가 반쯤은 더 짙어져 있었다. ‘한국이나 호주나 비냄새는 비슷하네’라고 생각하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꽃 향기가 강하게 훅 끼쳐왔다. 제대로 맡아보니 아카시아와 비슷한 향기가 그 골목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이 근처에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흰색 작은 꽃잎이 풍성하게 핀 나무가 있었다. 아카시아향과 비슷하긴 했지만 한국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정말이지 압도적인 향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향이 자꾸 생각났다. 나는 후각이 좋지 못한 편이라 향으로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누군가 어떤 향기를 맡으면 특정한 공간이나 어떤 때가 떠오른다던가, 사람이 떠오른다고 하면 그게 굉장히 낭만적이게 보여 부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나에게도 드디어! 추억할 향기가 생겼었다.


 그 당시에 나는 학교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학원도 다니지 않았고, 남아서 공부를 하는 학생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학교 마치면 바로 집으로 튀어 갈 준비를 했다. 왜냐? 할 일이 너무 많았거든. 책도 읽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고, 밀린 드라마도 챙겨 봐야 하고, 빌라 일층에서 파는 컵케익이 다 팔리기 전에 사러 가야 했다. 그런 이유들로 늘 걸음을 서두르던 나였다. 당시 계절은 봄이었고 햇볕은 기분 좋게 따수웠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가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햇볕의 따듯함에 가디건의 포근함까지 더해져 기분이 날아갈 만큼 좋았던 게 아주 생생하다.


 그렇게 길을 걷는데 어느 순간 처음 맡아보는 기가 막힌 꽃 향기가 코에 훅 들어왔다. 텁텁함이 전혀 없는, 아주 상큼하고 예쁜 향이었다. 향기의 근원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니 아주 작은 나무가 길 안쪽에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향을 맡아보니 내가 방금 맡은 그 향기가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보다 향기가 더 옅게 나는 것이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다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지나쳐 걸으니 처음 맡았을 때처럼 짙은 향기가 코를 찌르더라. 그래서 그 향기를 계속 맡고 싶어서 그 길 한가운데를 엉거주춤하게 서성이던 기억이 난다. 어정쩡하게 꽃 앞을 서성이는 내 꼴을 다시 생각해 보니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어쨌든, 나는 그 꽃이 라일락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 후로 한동안 하굣길에 라일락 앞을 서성이며 향기를 맡는 게 하나의 루틴이 됐다. 그런데 세상에 라일락이라니.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나에게 라일락은 광고 혹은 노래 가사에나 나오는 꽃이었지 이렇게 실제로 보고, 심지어 향까지 맡을 수 있는 꽃일 줄 몰랐다. 하물며 매일 다니는 하굣길에 있다니! 덕분에 늘 서두르던 걸음을 천천히 하며 그 시간을 만끽하곤 했다. 하교 시간이 늘어나 컵케익을 사지 못해도 괜찮은 날들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무 자체가 작고 꽃이 풍성하지 않아서 꽃은 금방 떨어졌고, 더 이상 향기를 맡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더는 그 길로 지나다닐 일이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 라일락을 본 적은 더러 있지만 그때처럼 짙은 향기를 맡아본 경험은 없다. 그렇게 처음으로 나에게 추억의 향기라는 게 생겼고, 그때부터 나에게 라일락은 어떤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뒤돌아 보게 되는 향’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꽃 향기는 바람의 영향인지 가까이 가서 맡는 것보다 어느 정도 떨어져 그 꽃을 지나쳤을 때 향기가 더 짙게 맡아지는 것 같다.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과거의 시간들을 돌이켜 보다 문득 이 모든 과정이 인간이 그리움을 느끼는 과정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우리도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서야 앞선 시간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마음에 품고 살지 않나? 억지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요새 후회와 그리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고 있어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이미 멀어지고 나서야 그 향기가 짙어진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과거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떠올리니 갑자기 먼 미래에, 호주에 있는 지금 이 시절이 얼마나 그리워질까 싶었다.


 아니, 그리움이고 뭐고 지금 여기 있는 순간을 더 즐기면서 지내면 되는 건데 왜 벌써 그리움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본다면,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걱정하며 그리움을 가불 한다는 것이 굉장히 우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매번 지나온 시절에 대한 실체 없는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내 입장에서는, 과거에 대한 이 반복되는 상실감이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사서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는 마치 타인과도 같다고 한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통합될래야 통합될 수 없고, 이것이 인간이 항상 과거를 그리워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기억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움을 생성하는 일’과도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지금처럼 매번 이렇게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나? 뒤를 바라보는 삶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과거를 그리워한다고 한들 우리에겐 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움에 고달파하는 우리가 삶을 더 잘 살아가려면 ‘현재를 즐기는 것’만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세상은 어려움 투성이고, 내 하루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지난날에 대해 모정하는 마음과 멀어질 수 없으니, 어차피 이 순간이 그리워질 거라면 미리 걱정하지 말고 일단 현재를 먼저 살아보자. 나의 현재와 끊임없이 투쟁하며 격렬하게 살다 보면 후회보다는 후련함이 가득한 과거가 생성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을 고달픔이 아닌, 단순한 추억 회상 정도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찔레꽃을 보니 향기로 남는 어떤 그리움의 대상이 떠올라 마음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번엔 라일락을 처음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꽃이 다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맡으려고 멀리서 보면 조금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전히 어정쩡하게 그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아무렴 어때,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만큼 현재를 즐겨보려고 한다. 설령 그 현재가 아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들, 이 청춘을 과거만 바라보며 보내기엔 다가올 그리움의 쓰나미가 너무 크다. 그렇다고 내 과거가 늘 행복하기만 했었나? 그건 절대 아니다. 그러니 미화된 과거에 한 눈 팔지 말고 당장 내 앞에 놓인 오늘에 집중하며 잘 살아가 보자. 이 말이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깊은 진심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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