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간호사지만 아빠를 돌보지 못했다

2021.04.28 내 마음이 준비되기도 전에 아빠는 먼저 떠났다.

by 가을
아빠의 발인이 끝난 후 홀로 갔던 강원도 바다



“야, 큰일났다. 니네 아빠 암이란다. 의사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데 이거 어떻게 하냐.”


어느 날 셋째 큰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혼과 사업에 실패한 아빠는 오빠와 나를 엄마에게 보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빠의 다섯 형제는 모두 그 고향에 남아있었다.


첫째 큰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던 할아버지의 재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아 그 지역에선 이름이 알려진 부자였다. 맏형인 그는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도맡아 했고, 다른 형제들은 맏형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명절이면 큰집은 할아버지 시절부터 일했던 가정부 아주머니의 정감있는 반찬과 형제들의 정치 이야기로 소란스러웠다.


나는 이혼 가정의 아이이기 때문에 명절이면 친가로 갈지, 외가로 갈지 매번 고민해야 했다. 사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릴 적 친가의 듬직한 용돈에 매번 친가를 택하곤 했었다.


아빠는 큰 아버지 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셋째 큰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배가 계속 아파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큰 병원으로 가보래.”

아빠가 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 외래를 예약했다.


담당 교수는 아빠에게 입원 후 검사를 진행할 것을 권했고, 입원해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아빠의 건강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대장암을 진단받고 항암치료, 수술을 진행하면서도 암은 빠르게 전이되었다. 걸어서 서울에 올라왔던 아빠는 걷지 못하게 되었고, 극심한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투약하자 섬망 증상까지 왔다.


“조용히 하고 들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고 그래.”

“내가 어디 갇혀 있어.”


아빠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내게 속삭였다.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나의 아빠가. 내가 암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수없이 마주했던 섬망 환자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간호사로서 환자에게 해주던 말을 아빠에게 반복했다.


“아빠. 이 사람들은 아빠 도와주는 분들이야. 아빠를 해치려는 사람은 없어. 여긴 병원이고, 저 사람들은 아빠 치료해주는 의료진이야. 아빠는 지금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뱉어내며 꾹꾹 눌러 말했다. 아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입으로 갖다댔다. “조용히 말하라니까. 아니야. 저 사람들 나를 해치려고 그래.” 나는 당혹감과 무력감에 병실을 뛰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며 섬망 환자들에게 시달려 고된 밤을 보낸 날엔, 나는 환자를 탓하고 돌봄을 힘들게 여기던 못난 간호사였다. 그런데 하늘이 그런 내게 벌을 준 듯, 우리 아빠가 그 환자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빠의 암은 가차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빠의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의료진이 미리 알려주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괜찮아지겠지. 수술하면 나아지겠지. 항암치료를 하면 괜찮아지겠지.’ 부끄럽지만 우리 아빠니까 나아질거라 생각했다. 정말 멍청하게도 우리에게 시간이 더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와 사랑한다는 말조차 나누지 못했다.



대장암 진단 후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아빠는 떠났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홀로 병실 침상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순간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빠의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했다. 명절이면 식구들에게 딸이 큰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했다고 자랑했던 우리 아빠였다. 그러나 정작 나는, 나의 일터에서 내가 돌보았던 환자만큼도 아빠를 돌보지 못했다. 아빠의 병 앞에서 나는 한없이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빠와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아빠를 홀로 떠나보냈다.



keyword
이전 04화내 친구 M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