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달리 단단했던 내 친구에게
M양과 항상 함께하던 등굣길
내 친구 M양
M양을 처음 만난 건 중학생 때였다. 우리는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고, 같은 단지 안에 살았다. M양과 나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M양은 엄마와, 나는 아빠와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며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M양은 키도 크고 예쁘고 성격도 밝아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학교에서 M양의 눈은 장난기로 반짝였고 입꼬리는 늘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의 그녀는 반짝이지 못했다. M양이 어렸을 적,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도망갔다고 한다. 그녀의 표현대로 하면 그렇다. 이후 아버지는 그녀의 언니, 동생 그리고 그녀에게 집착했다.
M양보다 5살이나 많았던 첫째 언니는 이렇다 할 직업이 없던 그녀의 아버지를 대신해 일찍이 취업하여 생활비를 보태었고 M양은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학교가 끝나면 그녀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집안일을 해내야 했다. 아버지의 집착은 M양이 커갈수록 심해졌고 고등학생이 된 M양의 손은 매일 붉은 매 자국으로 선명히 물들어있었다.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
“나 진짜 미쳐버릴 것만 같아.”
하루는 그저 밝기만 했던 M양이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성인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꾹꾹 참아왔지만,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아버지의 집착과 억압은 하루하루 더 심해졌다. 이유 없는 폭력, 숨 막히는 억압, ‘집-직장’만 오가는 이 답답한 생활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던 M양의 3살 아래 남동생이 성인이 되던 해, 삼 남매는 아버지 품을 떠났다. 도망 작전은 계획적이었다. 언니는 몰래 모아놓았던 돈으로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 월셋집을 구했다. 대학생이 된 남동생에게도 학교 근처 자그마한 자취방을 구해줬다. 그들은 아버지 몰래 조금씩 짐을 옮겼다. 그리고 하루아침 사라져버렸다. 마음이 따뜻했던 M양은 계획한 그 날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를 걱정했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혼자 계실 아버지가 걱정되어 냉장고를 꽉 채워놓았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이 치유되는 훗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M양이 집을 떠난 지 열흘쯤 되는 날이었다. M양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아빠가 내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왔어. 근데 내가 모른척했어. 나 이래도 되는 걸까. 집에 있을 때는 아빠가 그렇게 무서웠는데 막상 밖에서 보니까 너무 약해 보이더라. 아빠가…. 야윈 건가.”
고백하건대, 나는 지혜롭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오히려 어리석은 편이다. 나는 또 어리석게도 그동안 M양이 얼마나 힘들었으며,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며 자유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며 함부로 조언했다. M양은 “그렇지….” 대답했다. 담담하게 말하려는 M양의 목소리에서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M양의 성격상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자신이 외면한 아빠를 걱정했으리라.
그로부터 며칠 뒤 아저씨의 부고가 전해졌다.
M양의 아버지는 홀로 집에서 연탄불을 피워 생을 마감했다.
“경찰한테 연락이 왔는데 우리 아빠가 죽었대. 집에서 연탄을 피워서…. 그래서 집에 가봤는데, 먹을 게 아무것도 없더라. 나는 나를 옭매던 아빠가 없는 것이 신나서 여행도 가고, 매일 맛있는 것도 잔뜩 먹었는데, 아빠 집엔 냉장고가 텅 비어있더라. 내가 떠나지 말았어야 했나 봐. 나 때문에 아빠가 죽었나 봐….”
M양은 말을 제대로 이어 가지 못했다. 슬픔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정신이 나간 듯 횡설수설 한참을 말했다. 가슴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M양의 아버지가 그녀를 찾아온 그 날처럼 섣부른 위로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동안 그녀가 마땅히 누리지 못했던 자유와 행복을 빌었을 뿐이었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아버지의 집착과 엄한 훈육 속 10대의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정폭력의 방관자였던 나는 나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나는 그녀의 탈출계획을 가장 먼저 응원했었다. 그저 내 친구의 20대는 자유롭고 찬란하게 빛나길 바랐다. 그 결과가 이렇게 그녀의 아버지를 무너지게 할 줄은 몰랐다. 왜 내 친구가 이런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마음이 너무 아팠다.
든든한 동생이자 누나 역할을 하던 내 친구는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을 꾹 참았다. 그리고 일을 핑계로 뒤늦게 도착한 나를 보자마자 주저앉아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 와중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M양의 등을 토닥이며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저씨의 영정사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죄송스럽고 아주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가시면 내 친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아저씨.’ 속으로 잠시 생각하다 곧 이 생각이 죄송스러워져 얼른 고쳐먹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부디 하늘에선 평안하세요.’
몇 개월이 지나 M양은 다시 생활을 찾았다.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했고 남자친구도 만났다. 고양이를 키우며 위로받았다. 일, 집안일, 고양이 육아(?)까지 누구보다 바쁜 생활을 했다. 그러다 한 번씩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음을 쏟아냈다. 여전히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충실히 바쁘게 살아간다. 친구들에게 따뜻한 마음까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비슷한 모양을 했지만 나와 다르게 M양은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 M양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 뒤, 같은 달 나의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각자의 상실을 겪었지만, 그 무게를 감당하는 방식은 달랐다. 나와 달리 더 단단해졌던 M양. 나는 그런 그녀의 삶을 친구로서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