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의한 불안
"야, 탈출은 지능순이야."
입사 동기였던 형이 이직하면서 나에게 남긴 말이다. 재무 쪽에서 일하던 그 형은 이 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친구가 운영하는 스타트업의 CFO로 간다고 했다. 당연히 농담이었지만, 묘하게 각인되는 말이었다. 웃고 넘기기엔 그 말이 품고 있는 무언가가 나를 신경 쓰이게 했다.
나는 개발자다. 개발자라는 직군의 특성상, 중간중간 이직의 기회가 제법 있었다. 헤드헌터의 연락, 지인의 제안, 제법 괜찮은 회사들의 개발자 채용 광고. 이력서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시점들이 있었다.
한 번은 지인이 제법 좋은 조건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몇 시간이나 대화를 주고받았고, 들어보니 처우도 나쁘지 않았다. 회사는 제법 성공적으로 성장하는 중이었고, 내가 맡을 역할도 괜찮아 보였다. 잠깐 흔들리긴 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지금 회사가 나쁜 것도 아니고, 여기서의 내 위치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동료들과도 익숙하고, 시스템도 알고, 업무도 손에 익었다. 굳이 새로 시작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이 묘한 여운을 만들었다. 지금에 만족하여 가만있는 것이 맞을까, 이러다가 정체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떠난 사람이 잘 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형이 떠난 이후 거의 관심을 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이 한 번씩 아른거렸다.
나에게 불안을 주는 요인은 현재가 아니다. 현재는 불안할 일이 없다. 적당히 만족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 불안을 주는 요인은 가능성이다. 지금 적당히 만족하던 길을 떠나, 또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다. 그 길이 반드시 더 나아 보여서는 아니다. 다만, 다른 선택도 가능했다는 사실이 나를 흔드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두려움과 구분했다. 두려움은 대상이 있다. 실패, 해고, 가난처럼 분명히 지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불안은 다르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다시 말해 가능성 앞에서 생기는 감정이다.
내가 느낀 감정은 정체된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불렀다. 절벽 끝에 선 사람은 떨어질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자신이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현기증을 느낀다. 형은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뛰어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보였다.
뛰어내려야 한다는 강박도 아니고, 뛰어내리면 떨어진다는 공포도 아니다. 단지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가 어지럽다. 이미 확정된 것이 아니라 아직 열려 있는 것, 그 열림 앞에서 나는 흔들린다.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던 것 같다. 그 말은 우리의 상태를 두 가지로 갈라놓는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형은 뛰어내렸고, 나는 절벽 끝에 남았다. 형이 어떻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여전히 절벽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제든 뛰어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눈앞에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불안해진다. 내가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가 아니다. 단지 "다른 길도 가능하다"는 사실, 그 가능성 자체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여전히 모든 게 열려 있다는 사실. 그 열림이 무겁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해진다. 동물은 불안하지 않다. 본능대로 살면 되니까. 기계도 불안하지 않다. 프로그램대로 작동하면 되니까.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 자유가 가능성을 만들고, 가능성이 불안을 만든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없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불안을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통과 지점으로 본다. 불안은 내가 아직 자동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고, 여전히 가능성 앞에 서 있다는 신호다.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아직 자유롭다.
여전히 확답은 없다.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나를 흔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흔들림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나는 그 가능성 앞에 서서, 오늘도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