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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둥새 Jun 21. 2020

대학 1

선배와 동기

나도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의 인간관계를 회상해보면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었다. 대학이라는 사회에 먼저 진출하여 노련미가 물씬 풍기는 선배라는 범주와, 나와는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렇기에 어울릴 수 있었던 동기라는 범주다. 이 중에서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오고 있는 사람은 주로 동기라는 범주에 속했던 이들이다. 물론 양쪽을 다 합해도 손에 꼽을만한 수이긴 하다. 다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아도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온 사람들은 정말 소중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다.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하더라도 친구가 없는 삶은 그 누구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나온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니코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엮었다고 알려진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로 꼽힌다. 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8권은 필리아(philia)를 다루며, 이는 '친애'로 번역되었고, 대부분의 친밀한 인간관계 속 '우정'을 다룬다. 이상을 추구했던 스승 플라톤과 달리 현실을 추구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속 우정에 대 치밀한 분석과 사유를 보여준다.


나는 선배의 범주에 속했던 사람들에게 밥도 좀 얻어먹고, 대학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을만한 꼼수도 듣고, 동기들에게 정보력을 과시할 수 있는 학교 내 비화도 듣고는 했다. 대신에 선배님이라며 예의를 보이고 떠받들었다. 이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유용성에 의한 친애라고 하며, 유용성에 의한 친애는 그 유용성이 사라지는 순간 소멸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유용함에 기반했던 선배들과의 관계는 거의 다 끝이 났다. 선배들이 바빠지고, 졸업하고, 나도 나름대로 머리가 커지면서 선배들에게 얻을 것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돌이켜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나는 선배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후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동기의 범주에 속했던 사람들은 수업이 없는 공강 시간을 같이 보내는 관계였고, 고등학생 때는 즐기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대학생 문화를 즐기는 관계였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쾌락에 의한 친애는 친구가 되는 것도 빠르고 헤어지는 것도 빠르다고 말한다. 같이 놀러 다니던 동기들 중 코드가 맞지 않는 이들은 금방 서먹서먹해져 결국 남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자주 수업이 겹치거나, 비슷한 취미를 지녔거나, 같은 동아리에 속한 친구들 정도만 계속 교류하며 지냈다.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고 즐기는 것이 달라지면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동기의 폭은 계속 줄어들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친애란 "자신에게 좋은 사람에 대하여, 선의를 품고 있어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을 서로가 알고, 주고받는 사이에서 성립한다"라고 한다. 그리고 친애의 종류로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유용함에 기반한 친애, 쾌락에 기반한 친애, 그리고 완전한 친애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사랑할 만한 것'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유용한 것', '즐거운 것', '좋은 것'이다.


유용함에 기반한 친애는 '유용한 것'이 사라지면 지속되지 않는다. 쾌락에 기반한 친애 역시 '즐거운 것'이 사라지면 지속되지 않는다. 서로에게 유용하고 즐거워야 친애가 성립하는데, 한쪽의 유용함 혹은 즐거움이 사라지면 이는 더 이상 친애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만 유용함과 즐거움을 받고 있다면, 이는 주는 쪽의 호의가 지속되거나, 우월성에 의한 관계라도 성립되지 않으면 결국 끝을 맺는다.


좋은 것에 기반한 완전한 친애는 서로에게 좋은 것을 원하며, 권한다. 서로에게 어떤 부수적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서로가 좋은 동안 내내 지속된다. 좋은 사람들 간의 친애는 지속적이며, 서로에게 즐겁고 서로가 유용함을 나눈다. 서로에게 '즐거운 것'과 '유용한 것'을 바라는 관계가 아님에도 서로에게 즐겁고 유용한 것이다.


신입생 시절, 철없고 이기적이었던 나는 대부분의 인간관계에 유용함과 즐거움만 가지고 접근했다. 유용함과 즐거움이 사라지면 내가 먼저 끊기도 하고, 내가 끊김을 당하기도 하는 그런 관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끝까지 선의를 놓지 않던 선배와 동기들이 있었다. 나에게 그들이 바라던 유용함과 즐거움이 있었던 것일까. 시작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나에게 선의를 놓지 않은 그들은 나에게 결국 좋은 사람들이다.

 

시간이 지나 그들과 지속적으로 동고동락하면서 나에게도 그들을 향한 선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즐거움과 유용함을 떠나 그저 좋아졌다. 내가 그들에게 유용함과 즐거움을 주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에게 좋은 것을 권하는 사람은 되었다고 나 스스로는 생각한다. 결국 그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정말 친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말한다. 친애는 사랑받는 것보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라고. 사랑을 주는 것이 바로 친애의 덕이라고. 나에 대한 선의를 놓지 않은 친구들의 덕 덕분에 나에게도 지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들에게 덕을 발휘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덕. 도덕의 의미보다는 탁월함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이 덕을 행할 기회가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굉장히 늦은 밤이다. 최근 바쁘다고 친구들에게 소홀했던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밤이다. 친구들과의 단체 메신저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근황도 딱히 궁금해하지 않던 나 스스로를 반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정신적인 사유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 실천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라서 고맙고 잘들 자라."

"뭐래 미X놈이. 술 마셨나."

이 늦은 밤, 지나치게 감성에 치우쳐버린 나의 이성을 깨워 중용의 덕을 깨닫게 해주는 즐겁고, 유용하고, 좋은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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