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둥새 Jun 03. 2020

일상 2

소크라테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너무나도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서 아테네에는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이가 없다는 신탁이 나왔다.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며 그 유명한 산파술로 아테네의 똑똑하다는 사람들을 전부 두드리고 다녔다. 그 결과 그나마 자신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라도 알지, 나머지는 그마저도 모른다며 그 신탁을 인정한다.


얼마 전 살짝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경험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처참히 깨진 사람으로서의 경험이다. 타 팀의 S연구원이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며 말을 걸어왔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서 내가 담당한 부분이었고, 꽤 이전부터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문제는 없는 것 같지만, 확인은 해보겠다고 답변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문제가 있었다.


문제를 인정하기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발생하기 힘든 문제다." "프로젝트 규모가 점점 커지면 발생할 여지가 있다." "엮여있는 부분이 많아 수정이 쉽지 않다." "그대로 가기에는 리스크가 있다." 계속되는 논쟁에 피곤을 느끼다 갑자기 현자 타임, 그러니까 현실 자각 타임이 찾아왔다. 처음부터 내가 인정했으면,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으면 논쟁 거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제가 놓친 부분을 찾아줘서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큰 노력을 기울여 진행했던 프로젝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 누군가가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발끈할 수밖에 없다. 아마 소크라테스가 물고 늘어졌던 아테네의 정치인, 학자, 전문가들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유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재판까지 회부되었다. 그리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형 판결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작별 인사를 한다.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온 내용이다.

"내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훌륭한 인격을 추구하지 않고 재물이나 그 밖의 속물적인 것에 빠져 산다면, 내가 그동안 여러분을 괴롭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아이들을 괴롭혀주십시오. 이제는 떠날 시간입니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행복한 나라로 가게 될지는 신만이 알 것입니다."


재판에서는 살기 위해 배심원들을 설득하고 동정심을 유발하여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지 않았다. 옳은 말만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렇게 사형을 선고받은 뒤에는 유언으로 자신의 자식을 옳은 길로 이끌어 줄 것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부탁한다. 자신의 철학을 지키기 위해 탈옥은 꿈도 꾸지 않고 결국 독을 먹고 죽는다. 이런 판결을 내린 아테네 시민들을 보며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라고 비난하였고, 현재에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는 다행히 소크라테스를 죽이지 않았고, S연구원도 소크라테스처럼 이쁜 말 한번 없이 죽을 때까지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뒤늦게나마 엮여있는 부분, 프로젝트 일정, 해결법을 고려해서 수정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얘기했다. 일이 복잡해지기는 하지만 그의 말이 정론이었고, 실제로 내가 놓친 부분이기 때문이다. 논쟁이 마무리되면서 S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바쁘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해결되면 검증은 제가 해볼게요." 검증이 제일 귀찮은 부분이었으니, 나로서는 고마웠다.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라고, 내가 전문가라고, 내가 잘 아는 분야라고 가끔 자만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결국 놓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그중에 잘 모르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이러한 부분이 지적되었을 때, 괜히 아는 척하고, 화를 내며, 궤변을 내세워 상대를 이기려 한다. 나름대로 이런 때를 인지하고 이러지 않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할 틈도 없이 상황에 휩쓸려가는 순간이 있어서 걱정이다. 소크라테스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소크라테스를 죽이지는 말아야 할 텐데.

작가의 이전글 일상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