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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둥새 Jun 01. 2020

일상 1

일상이라는 숲

반복된 일상은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누구나 건물주, 로또 당첨, 주식 대박을 꿈꾸고 있지만, 유독 회사원들이 이런 주제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반복된 일상에서 탈피해 인생에 큰 변화가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수많은 회사원 중 한 명인 나 역시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고, 똑같이 행동하고 있으면서, 혹시라도 인생의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까 기대하곤 한다. 


이런 생각이 가장 크게 드는 시간, 6시 반.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인상을 쓰며 알람을 끈다. 겪어본 지 한참 된 방학이 너무 그리운 순간이다. 재택근무가 마냥 부러울 뿐이다. 보안이 매우 중요한 업무 특성상, 폐쇄된 네트워크에서 작업하고 있는 나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한다.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7시 반. 이 시간의 1호선은 만만찮다. 지옥철까지는 아니지만 그 직전 상황까지 가기도 한다. 이래서 더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그것이 잘 안된다. 간신히 e북을 켜 독서를 한다. 오늘의 출근길 독서는 팩트 폭력을 가했다. '결국 회한에 빠진 사람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고 용기가 부족한 사람' 이라니. 작가의 통찰이 나를 아프게 했다. 덕분에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 도착하면 8시 반. 업무 준비를 시작한다. 이런저런 세팅을 끝내면 오늘은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무엇인지,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전날에 미리 정리해두면 당일 바로 업무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내심 그렇게 합리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다. 정리가 얼추 끝날 때쯤, 나보다는 늦게 출근하는 몇몇 친한 이들의 메신저에 불이 켜지고, '모커 ㄱㄱ'라는 메시지가 오면 사무실을 잠시 나선다. 커피를 사 오며 짧은 잡담을 나누다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순간이 진짜 업무의 시작이다. 카페인의 힘을 빌린 뇌가 각성하여 업무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오전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집중한 탓도 있지만, 11시 반이라는 이른 점심시간의 영향이 가장 크다. 덕분에 점심을 먹기 위해 웨이팅 할 필요도 거의 없고, 아침에 카페인 말고는 딱히 먹는 게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적절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간의 큰 단점은 오후가 너무 길다는 것이다.


미치도록 바쁠 때야 부족한 게 시간이지만, 애매하게 바쁠 때는 모순된 느낌을 받는다. 바쁘고 할 것은 많은데 지루하다. 사무실은 너무 답답하고, 중간에 회의라도 껴있으면 일의 흐름도 끊기고, 막상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마음마저 갑갑하다. 어떻게 버텨내다 보면 사실 집중이 제일 잘 되는 시간은 퇴근이 가까워질 때쯤이다. 결국 한창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 지나있고, 야근을 하고 있다. 그럼 저녁을 안 먹기 애매한 시간이고, 같이 야근하던 누군가의 제시로 퇴근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간다. 이런 경우는 당연하지만, 최소 반주 한잔 걸치기 마련이다. 같이 저녁을 먹는 이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이면 저녁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최근은 자제하는 분위기라 오늘은 정말 반주만 걸치고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집에 오니 9시, 씻고 나니 10시.


오늘 하루를 슬쩍 돌아봤을 때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하루 중 하나였다. 반복된 일상은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그렇게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오늘의 내 일상을 다시 한번 되돌아봤을 때, 이것이 정말 늘 똑같은 하루였을까. 크게 봤을 때는 말 그대로 일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출근길 독서의 내용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어제의 업무와 오늘의 업무가 같지 않다. 커피를 사러 갈 때 나누는 잡담은 매일 천차만별이다.


하나하나 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다르고, 특이하며, 소중한 일상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를 깨닫지 못했을 때의 나는 매너리즘에 빠졌고, 이를 어느 정도 체감했을 때의 나는 그 하루를 소중히 여겼다. 지금도 여전히 왔다 갔다 한다. 지루하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얻은 나만의 깨달음은 일상을 단순 반복되는 지루함으로 보는 것은, 숲만 보고 그 숲이 어떤 나무, 어떤 동물, 어떤 곤충들이 어우러져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함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숲만 보지 말고, 나무도 좀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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