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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둥새 Jan 01. 2021

자기 단련

명상록

최근 그다지 좋지 않은 순환의 고리에 빠져버렸다. 연말에 일이 좀 꼬이면서 살짝 늦은 퇴근을 하고 있다. 퇴근하고 나서는 또 나름대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개인 시간을 조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그 시간에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좀 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다 보면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굉장히 피로한 상태이지만 제법 오랜 기간 쌓인 생활 습관 덕에 간신히 극복하고 출근을 한다.


회사일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처리할 일들이 많은데 피로까지 쌓이니, 마음의 여유가 많이 사라진 듯하다. 그런 탓인가, 보통은 출퇴근 시간에 책을 주로 읽고 이때가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생각이 조금만 복잡해져도 머리에서 잘 굴러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저 단순한 킬링 타임용 콘텐츠만을 즐기게 된다. 사실 이런 경우를 처음 겪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매너리즘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저런 일로 감정 소모가 발생하고, 회사일은 바쁘고, 개인 시간은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는데, 체력 충전도 제대로 하지 못해 피로가 쌓이면서,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상태인 듯하다. 예전에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회복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법 긴 시간을 무기력증에 빠져 주체성 없이 주어지는 일들이나 간신히 처리했고, 친구들과 노는 것도 귀찮아했고, 혼자만의 시간에도 정 할 게 없으니 아무거나 하자라는 생각으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당시보다 나이를 먹고 경험도 좀 생기면서, 이런 상태가 아예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극복하는 시간이 점차 단축되기 시작했다. 무기력하게 몇 달을 지내왔던 과거와는 달리, 하루 정도 충분히 푹 쉬면서 리프레쉬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를 좀 돌아보면 금방 이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를 좀 돌아본다는 의미는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내 사고의 방향을 틀어주고, 이번 기회에 다시 자기 단련의 필요성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단련이라 함은, 물론 몸을 건강히 유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내 감정이나 정신과 같은 내면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꺼낸 말이다. 나를 돌아보고, 내 행동을 반성하고,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지향해야 할 것과 지양해야 할 것을 구분하면서, 배울 것은 배우고 그렇지 못한 것은 반면교사 삼아 끊임없이 자아 성찰을 하는 것. 물론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이렇게까지 자아 성찰을 할 자신이 없다. 아주 가끔씩 내 상태가 삐리 할 때나 한번 필요성을 느끼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과거의 어느 인물이 이를 실천한 흔적이 있다.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이다. 명상록은 무려 로마제국의 황제가 그것도 전쟁터에서 무려 10여 년에 걸쳐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써 내려간 글이다. 황제임과 동시에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의 철인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명군이었던 인물이다.


"내 조부에게서는 선량함과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내 아버지에게서는 겸손함과 남자다움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내 어머니에게서는 경건한 삶과 베푸는 삶, 잘못된 것을 하지 않는 삶, 검소한 삶을 보았다."

"내 증조부 덕분에 배움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명상록 1권에는 이렇게 누구에게 어떤 훌륭한 점을 보았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뿐만 아니라 개인교사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많은 스승들 하나하나에게 배울 점을 적어놓았다. 인상 깊은 것은 자신이 그러한 점을 배워서 실천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런 점을 보았고, 단지 자신은 그런 점을 배우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의미로 적혀있다. 그리고 명상록 6권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너의 마음을 즐겁고 기쁘게 하고자 한다면, 네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의 좋은 점들을 떠올려보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품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미덕들이 여기저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을 생각해 볼 때만큼 즐겁고 기쁜 때는 없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겸손과 덕이 있으며,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미덕을 본받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책임을 완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의지를 북돋기 위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공동체에 헌신하기 위해 자신을 단련시켰다.

"꾸밈없는 당당함과 동포애와 독립심과 정의감을 가지고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사심 없이 완수하고, 다른 잡념들은 모두 다 버려라.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마치 그 일이 이 땅에서 네가 하는 마지막 일인 것처럼 행하고, 네가 의도적으로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너의 감정에 이끌려서 제멋대로 행하지 않으며, 위선과 이기심과 네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너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의 사고력으로 이 일을 하기에 충분한가, 아니면 충분하지 않은가. 충분한 경우에는, 우주의 본성이 내게 준 도구인 나의 사고력을 이 일에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일이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나는 그 일에서 손을 떼고 나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고,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되, 나를 지배하는 이성과 협력해서 바로 이때에 공동체에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라는 절대 권력에서 자신을 타락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만이 옳다는 아집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누구라도 나의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며 나를 깨우쳐 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잘못을 고칠 것이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는데, 진리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 반면에 자기기만과 무지를 고집하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

"황제 행세를 하려 들지 말고, 황제 노릇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게 되기가 쉽다. 늘 소박하고, 선하며, 순수하고, 진지하며, 가식이 없고, 정의의 친구가 되며, 신을 경외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많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할 때에는 과감한 사람이 돼라. 언제까지나 철학이 만들어 내고자 하는 그런 이상적인 사람으로 남기 위해 애쓰라."


무엇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러한 자기 단련을 즐겼다. 철학을 사랑했다. 심지어 로마 황제보다 철학자가 되고 싶어 하며, 끊임없는 황제의 업무 속에서 철학을 그리워했던 인물이었다.

"네게 계모와 생모가 동시에 있다면, 계모에게 마땅한 도리를 다하겠지만, 너의 마음은 끊임없이 생모에게로 향할 것이다. 지금 네게는 궁정이 계모이고 철학이 생모다. 그러므로 너는 늘 철학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안식을 얻으라. 그러면 궁정에서의 삶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고, 궁정에서의 삶도 너를 품어서 끌어안게 될 것이다."


결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시대의 최전성기를 이끈 다섯 명의 황제, 오현제 중 한 명에 속하며 가장 고결한 황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가장 헌신했던 황제로 추앙받았다. 나는 비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할 자신은 없지만, 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을 다 잡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명상록을 썼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수십 번 돌아보고 자아성찰을 하더라도,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쉽게 마음속에 녹아들지 않는다. 이때 내 머릿속,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정리하기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글로 써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그래서 틈틈이 자신의 내면을 글로 표현했고, 그것이 모여 명상록이 된 것이 아닐까.


나는 플라톤이 말한 철인 군주가 될 일도 없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로마의 황제도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자기 단련이라는 것이 중요할까도 싶다. 내가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국가가 위험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라는 개인은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 아닌가.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사는 인생의 주체는 '나'이고, 그런 나 자신을 단련해보는 것이다.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과, 나 자신을 단련해서 지혜롭게 살아보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어본다면, 아직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수준의 지혜를 갖추지는 못해서 모르겠다. 그래도 훗날 언젠가는 알 수 있는 어떠한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해보는 것이다. 다행히 내 인생의 남은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도 더 길 것 같다. 이 긴 시간을 좀 더 지혜롭게 살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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