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이다. 주말의 평온함은 끝이다. 이불속에서 몇 분만 더 누워있고 싶은 마음,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의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몸을 일으킨다. 주말 간 느꼈던 여유로움과 평온함을 포기하고, 고통 속에 나를 던지는 것이 맞는 걸까?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출근길에 올라선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평온한 상태에 두었다. 불필요한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단순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이 행복의 비결이다. 특히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고,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절제된 삶을 강조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과 불안을 없애는 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회사 프로젝트가 끝나고 평온함을 느끼는 순간, 나는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또 다른 과제에 발을 들인다. 어려운 책을 읽으며 고통받다가도, 마침내 완독 했을 때의 짧은 성취감만 즐긴 후 다시 어떤 책으로 고통받을지 고민한다.
왜 나는 평온함을 뒤로한 채 스트레스와 고통을 찾아다닐까. 우선 '성장'이라는 가치가 '평온함'보다 우선시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난해한 책을 완독 했을 때의 그 뿌듯함, 어려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의 자부심. 현대는 고통을 통한 성취감으로 얻는 기쁨이 일반적이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에피쿠로스의 평온함은 현대에서는 너무 정적이고 소극적이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고통의 부재를 위해 우정을 나눌 이들과 함께 조용히 사는 삶을 강조했다. 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하며, 공공적 참여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사회 참여가 강요되며, 실제로 사회 참여 없이 살아가기 힘든 사회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현대와는 완전히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지혜를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어떤 고통이 성장과 발전을 위해 감수할 만한 '의미 있는 고통'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출근길의 불필요한 스트레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과도한 경쟁, 끝없는 소비욕구로 인한 불안. 이런 고통은 에피쿠로스의 조언대로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 반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도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 깊은 통찰을 얻기 위한 사색. 이런 '의미 있는 고통'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평온함을 즐기되, 때로는 그 정원 밖으로 나가 도전의 길을 걷는 유연함. 아마도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균형일 것이다. 의미 있는 고통을 선택하다가도, 지친 나 자신을 위해 '아타락시아', 마음의 평온 상태를 찾아가기도 하는 그런 지혜를 갖추기 위해 노력해 나가는 중이다.
...라고는 하지만 월요일 아침이라는 사실이, 내가 출근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끄적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