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
오 마이갓..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브랜드를 만들려면 아무래도 할 일들이 많잖아요? 제품은 당연히 완성도가 높아야 하지만, 그 외에도 로고도 만들어 달아야 하고, 패키징에도 신경 써야 합니다. 온라인으로 판매를 시작해야 해서 홈페이지도 만들어야 했어요. 그런데 육아휴직을 하고 시간이 지나며 날씨도 더워지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지며 일의 효율이 잘 나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SNS에 60일 뒤에 브랜드를 만든다고 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실패하면 쿠팡맨을 한다고 공약을 걸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만큼 자신 있었나 봅니다.
원단을 고르는 건 의류 제작하는 사람들의 주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마침 2024년 8월 21일부터 코엑스에서 프리뷰 인 서울(PIS)이라는 원단 페어를 하더군요. 한국의 원단 회사 외에도 일본, 중국, 파키스탄 등에 본사가 있는 메가 플레이어들도 참가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알고 있는 의류업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의류업은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의식주' 중 한 카테고리에 속하는 업종입니다. 때문에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인류가 옷을 입기 시작할 때부터)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고, 규모와 동시에 각 분야에서 극한으로 디테일하게 발달이 된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습니다. 짧은 기간이 아닌 세월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일본 원단이 비싼 이유...
다시 돌아와서, 페어에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일본 코듀로이 원단을 발견해서 따로 업체를 방문하고 발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동대문 원단 보다 3배가량 비쌌는데, 이미 원단과 사랑에 빠져서 가격이 보이지 않았던 거 같아요. 게다가 해외에서 원단을 가져오려면 여기서 배송비, 커팅비, 관세, 부가세가 추가됩니다. 최종적으로 일본에서 직접 사면 동대문 가격의 2배 내외였지만, 한국에서 사면 5배 정도의 가격이었습니다.
홈페이지는 하루 만에 쌉가능
그리고 이제 홈페이지 기획도 하기 시작했죠. 사실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래 봬도 금융권에서 컨설팅과 스타트업 전략 기획을 10년 넘게 했는데 홈페이지 정도는 뭐... 하루 만에..??
개발도 문제없었습니다. 아임웹과 같은 홈페이지 생성 툴들은 개발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도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더군요. 디자이너, 개발자의 아웃소싱 없이 기획한 사람이 모두 직접 다 하면 되었습니다.
이게 또 컨설턴트의 종특이긴 한데, 매번 새로운 일을 하는데에 익숙해지다 보니 뭘 해도 금방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흘러넘치곤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신감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진 빠르게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어.. 왜 이렇지..?? 한 글자가 안 쓰이네...?
그런데 이럴 수가. 홈페이지 기획을 하는데 이상하게 한 글자를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뭐가 문제인 지 모르겠는데 의미 없는 페이지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걸 폐기하면... 얼마가 손해일까..."
원단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으니, 일본에서 원단이 도착했는데 기존 원단과는 달라서 퀄리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가의 원단이다 보니 한 번의 실패로 폐기를 하면 꽤 큰 손해가 발생했어요. 하루에 제작 가능한 수량도 많지 않은데, 한번 폐기가 발생하면 치명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아 이건... 다른 기계가 필요한데..."
모든 위기는 한 번에 온다고, 미싱기계에서도 한계를 느꼈습니다. 아무리 버킷햇이라도 기본 기계(본봉이라고 합니다) 외에 오버로크와 쌍침 미싱이라는 것이 있어야 제가 생각하는 재봉 방법을 써서 모양을 만들 수 있었거든요. 부분적인 곳에서 장비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 여행이었습니다. 스티치잇이라는 곳에서 주최했던 원단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일본 시장을 보고 충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모자의 나라였습니다. 퀄리티는 당연하고 재봉만 보아도 디자이너의 자신감이 느껴졌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브랜드가 구축한 세계관 자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950년대의 모자를 복각하는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그때 제작에 사용했던 재봉기계를 실제로 구해서 제작을 합니다. 현재 더 좋은 기계가 있다고 하더라도요. 그리고 당시의 원단은 물론 부자재들까지 최대한 동일하게 구현하되, 현대적인 감각을 반영해서 제작을 합니다. 제품에 대한 철학과 고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까마득히 앞서가는 브랜드들을 보고 저와의 갭을 느끼며 완전히 좌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60일간의 브랜드 만들기 챌린지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가야 할 방향성도 모르겠고, 기술적인 부분도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고, 일본의 브랜드들처럼 완성도 높은 퀄리티와 디자인, 세계관을 따라갈 수 없을 거 같아서 도저히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리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 상태로 슬럼프에 빠져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