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반갑지 않은 손님

by 김지은

애증의 관계라는 걸 나는 익히 실감을 해왔는데, 그런 사람과는 이제 더는 마주하지 않도록 한다. 말이 좋아 애증이지 사실 증오 비슷한 감정이 섞여있다면 그건 애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애증이라는 말은 그저 '나빠보이지 않게 포장한 단어'이며 사실은 '증오하는 사람' 내지는 '거북스러운 사람, 싫은 사람'일 뿐이다.


내게는 그런 존재가 몇몇 있었지만 그 중에서 오랜기간 날 붙잡아둔 존재가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함께해온 사이, 우리는 '친척'이라는 이름하에 묶인 인연. 처음부터 내가 정해서 부르거나 만든 인연이 아니라 각별히 사이가 좋은 엄마와 이모와의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동여매진 인연이었다.


항상 싫은 건 아니었다. 어릴적 나를 챙기고 좋아해주고 친동생보다 더 아껴주던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까. 즐거운 기억 아직도 생생하다. 종종 우리가 놀았던 장소에 가면 어른이 되어서도 즐겁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모험하듯이 놀러다니고 도전정신이 강한 그 언니는 내게도 여러 경험을 시켜주었다. 다만 그 관심, 도움, 아껴줌이 점점 집착, 틀, 강요로 이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내 머리가 클수록 그것들은 나를 얽매이고 내 행동을 흑백으로 나누어 판단하여 그 언니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정답이 되고 오답이 되기 시작했다. 어릴때에도 다행히 나는 나만의 또렷한 뭔가가 있었는지 언니를 따르면서도 어느 순간 '시험 봤으니까 시험지 가지고 우리집으로 와'라고 했을 때 거절을 했다. 그렇게 시작이 된 불협화음.


애정은 서서히 증오로 번져가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동생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언니와 내 모든 걸 부정하고 자기 색으로 맞추려고 하는 그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고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동생인 나. 그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인이 된 성인에까지 이어졌다면 어떠한가.


애증이라는 게 참 재밌다. 증오가 서릴 땐 어느 순간 '애정했던 기억'이 내 죄책감을 건드린다. 날위해 대신 나서주던 모습, 나랑 뭔가를 하고자하는 모습, 날 걱정해주던 모습, 나랑 즐겁게 놀던 모습 모든 게 다 애정한 기억이다. 하지만 증오하는 패턴이 시작이 되면 마음이 쫙 짜낸 행주처럼 여유가 없다.


도움을 받았는데 왜 싫어해? 널 도와준다는데 왜 싫어해?


나 스스로도 내 마음을 정의하지 못하겠고 내가 이기적인 것 같이 느껴지고 하지만 분명한 건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온통 수증기로 가득한 관에 갇혀있듯이 이유도 모르게 답답했다. 같이 있으면, 내 존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고마운 사람이지만, 지금에 결론을 내리자면 좋은 사람이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뿐이었다. 그걸 내가 해석하고, 이해하려하고 상대방의 입장까지 내 감정을 대입해서 묻고 묻고 묻다보니 너무 힘든 거지. 체계가 확고한 사람이었고 머리가 자라면서 알게된 건 '나 역시 체계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고 이해가 어려울 수밖에...


나도 내 바운더리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내 루틴 이런 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걸 하나하나 세세하게 누군가가 돌려놓고 왜 그러냐며 의문을 하고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나는 죽을듯이 답답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 결국 나는 오랜 의문과 고민을 하다가 내가 살기 위해 20대중반, 드디어 그 존재의 손을 놓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놓음이었는데 그 사람은 당연히 놀랐고 나는 당연히 당연했다. 이미 10년전부터 나는 이순간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연인들의 이별처럼 서로 동상이몽 속에 살고 있었다. 아마 그 언니는 이별 이상으로 상당한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놓지 않으면.. 날 놓지 않았을 것이기에. 난 더이상 누군가를 내 삶의 주체로 놓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을 누군가에게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대로 내가 옳다는 것을 유지하고 진행할 권리가 있고 나는 그래야만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애증의 존재를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이 사람을 '그냥'도 곁에 두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사실 그렇게 최악이 아니면 그냥 곁에 둬도 되지만 절대로 관계에 '중간'을 두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애인처럼 진득이 하루를 같이 보내거나 헤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 할 수 없다. 그 언니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래서 헤어진거고. 무엇보다도 그 언니가 가족과의 마찰로 인해 대학교 방학때에도 집에서 부랴부랴 쫓기듯 나와서 헤매던 시기가 있었다. 나 역시 방학이라 집에서 늦잠을 자기 일쑤였는데, 엄마입장에서는 조카가 힘들어하니 집에 있게하기 위해 오라고 한 모양이다. 나는 자다가 인기척에 깨고, 자는 날 깨우는 것까지는 면목이 없었는지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그 등을 기억한다. 조용히 밥을 먹는다. 엄마도 가족들도 다 출근과 등교를 한 상태로 집에는 언니와 나뿐. 그냥 조용히 먹는다.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미안해. 저 모습을 그냥 이렇게 지켜보는 게 너무 미안해. 하지만 나는 일어날 수 없어. 난 언니에게 잘해줄 자신이 없어. 너무 미안해.


지칠대로 지친 나는 감정적으로 동태가 된듯이 딱딱히 굳어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며 눈을 감는다. 언니는 소리없이 밥을 먹는다. 먹고 조용히 일어나 겉옷을 입고 조용히 집을 나선다.


증오는 사람을 애정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그때 절실히 깨달은 건, 언니를 위해서라도 이 관계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 언니가 본의아니게 나로 인해 상처를 앞으로도 정말 많이 받을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잘 맞지 않았고, 내가 아라고 말하면 언니는 하라고 알아들었다. 우리는 결코 아라고 말했을때 아라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만두는 서로에게 맞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등을 조용함을 기억하지만 여전히 그 당시의 내 마음도 기억한다. 증오라기보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못하겠어' '자신없어' 싫은 게 아냐. 그냥 더는 못하겠어.


내게 절대로 소중해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사람에게 내가 소중해지기 전에 그만둘 생각을 하고 정리한다. 내 마음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딱딱하다. 내 마음은 언제나 내가 우선이다. 그래서 내 마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것 같은 상대는 미리 멀리한다.


간간히 그 언니같은 사람들을 만난다. 나에게 잘해주고 배려하고 챙겨주려하고. 그런데 난 왜 그 마음이 답답할까. 그 절박한 느낌, 나를 부르는 절박한 음성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가끔 엄마의 눈에서도 목소리에서도 그런 걸 들으면 힘이 쫙 빠져버린다. 제발.. 날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


외로운 사람 곁에 있으면 더 외로워진다. 내 이름을 그렇게 간절히 부르던 사람들은 아마도 외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절실하게 나를 부르고 나를 잡고. 그게 싫다. 외로움에 대체되어 이용되는 기분이 싫다.


나랑 있으면 불쌍해지는 사람이 싫다. 내가 불쌍하게 만드는 사람이 싫다. 그래서 가능하면 앞으로도 나로인해 불쌍해질 사람은 절대로 가까이 두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아니면 애정은 절대 살아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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