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젖은 것들을 둘러보다

-우리의 세계가 아닌 '부부의 세계'

by 정상순

태풍이 지나갔고 폭우가 쏟아졌다. 작은 아이 등교길이 안전한지 살필겸, 아침 산책도 할겸 집을 나섰다. 예상이 빗나갔다. 많은 것들이 제자리에 꼼짝 않고 있었다. 물에 젖은 것들은 이상하다. 이상하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상하다. 비에 젖은 사물보다는 비에 젖은 생물이 더 이상하고 비에 젖은 식물보다는 비에 젖은 동물이 더 이상하다. 비에 젖은 사체는 아주 더 많이 이상하다.


산책길에 비에 젖은 사체를 목격하진 않았다. 그저 물에 빠진 오필리어를 생각했다. 목소리를 잃고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를 생각했다. 트로이를 향한 뱃머리에서 목이 잘린 이피게니아를 생각했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를 생각했으며 자신의 손에 묻은 피는 바닷물로도 씻겨낼 수 없으리라던 레이디 맥베스를 생각했다. 그리곤 바다를 향해 걸어가던 지선우를 생각했다. 그 날 왜 하필 그렇게 큰 파도가 쳤는지 모르겠다. 지선우가 파도에 휩쓸린 건지 몸을 맡긴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다 하늘을 일별하던 지선우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가던 그 미소, 그게 참 사람을 환장하게 했다.


부부의 세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드라마에도 물가가 많이 등장한다. 서스펜스를 상승시키기 위한 요소로 저수지, 바다, 호수 등이 이용된다- 다종장르를 섭렵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일단 내겐 호러물이다. 두 가지 장면에서 그렇다. 우선은 이태오의 생일파티 씬. 자신만이 어떤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모두들 한 가지 사실에 공모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나 자신을 무지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으로 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그 무지의 상태가 타인에게 쾌락과 연대의 장을 열어줬다는 것에서 이 장면은 진정한 호러다. 마치 미케네의 원로들이 이피게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서로를 향해 "쉿!"하고 속삭이는 장면이 연상된다. 지선우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행보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요모조모 따져볼 구석이 적지 않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부부의 세계가 내게 호러물인 보다 절대적인 장면은, 아니 장면이라기 보다는 어떤 상태이기도 하고 어떤 피사체이기도 한데, 바로 지선우의 집이다. 지선우의 집은 완벽하다. 청결하고 아름답고 기능적이다. 소도시 병원의 부원장이라는 지선우의 캐리어는 가사노동자라는 지선우의 또 다른 캐릭터를 훼손하지 않는다. 프라이빗한 공간이 이층으로 모두 올려져있고 주방과 거실 그리고 서재가 합리적으로, 미학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이 공간을 살피고 돌보고 돌아가게 하는 것은 모두 지선우의 몫이다. 가사도우미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날 가사도우미가 왔고 오늘은 지선우가 가사일을 한다, 라는 식의 설정이 아니다. 의도적인 삭제다. 지선우는 병원일과 집안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여다경의 집에 가사도우미가 등장하여 지선우의 아들 준영과 대화하는 장면이 삽입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여다경이 대빵 잘사는 부모의 전적인 지지와 후원 덕분에 결혼생활을 한갖 게임처럼 치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선우는 청소년기에 부모를 모두 잃는다. 뿐만 아니라 믿고 의지하던 친구와 동료와 이웃들은 지선우만 빼놓고, 아니 지선우를 빼놓아야 웃을 수 있다. 드라마 출발 선상에서 지선우에게 요구되는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다. "너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너는 이미 완벽해. 그러니 쭉 혼자서 해결해."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다고 믿는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지선우가 반복적으로 이태오에게 회귀하는 이유는 준영이가 준영이이고 스카이캐슬의 예서가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부 관계라는 것이 원체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칼로 무 자르듯이 단박에 결판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만도 아니다. 지선우가 이태오를 못 잊어서도 아니며, 정신과 닥터가 뜨뜻미지근하게 굴어서도 아니다. 지선우에게는 이태오말고는 손잡을 이가 없다는 것이 준영에 대한 집착과 이태오에 대한 회귀의 근본적인 이유다. 설명숙과 고예림이 지선우의 손을 잡기 시작했을 때 그 때 비로소 지선우의 표정은 밝아지고 안정된다.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설정의 문제다. 이제 여성을 고립시켜놓고 출발하는 서사들은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심봉사와 뺑덕 어멈 사이에서 심청과 심청모의 관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햄릿과 거트루드가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되는 것에 의문을 품을 이유가 있다. 인어공주는 왜 '목소리'를 내어주었는지 그 목소리가 왕자의 키스 따위로 교환될만한 것인지 반문할 시간이 됐다.


물에 젖은 것들과 산책하다가 얘기가 옆으로 많이 샜다. 내내 물에 빠진 오필리어를 생각했고 그 죽음이 꽃가루와 함께 형상화되는 장면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졌으며 물과 여성을 그토록 연결짓고 싶다면 그것은 오히려 엄마의 뱃속 양수 속을 유영하고 있던 그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은 물에 젖어 꼼짝않고 있는 비체가 아니라 숨쉬고 헤엄치는 살아있는 무엇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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