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들, 사라져가는

by 정상순

그해 들판에는 꽃이 유난히도 많이 피고 꽃 진 자리에서는 잎도 무성하게 돋아 나오다 잎은 오랫동안 가지에 달려 있고 그 아래에서 소들은 잘 쉬다 염소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치던 토끼는 연둣빛 풀을 배불리 먹고 작은 토끼를 낳고 들판을 아가 토끼와 걸어다니다 여자들은 아가 토끼를 사랑하여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수를 놓다 가지고 온 점심 도시락을 열어 까르르거리며 맑은 장아찌를 흰밥에 올려 먹다 그리고 그해 들판에는 해도 자주 나와서 여자들의 등을 만져주다 여자들은 해를 껴안고 깊이 잠이 들기도 하다 바람이 지나갈 때 잠깐 깨어나서 눈을 부비다 구름은 나즉하고 하늘은 깊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는 이 세상 소리가 아닌 것처럼 맑다 여자들은 다시 눈을 감으며 멀리 잠이 들다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그해 들판에서 많은 짐승들이 평안할 동안 멀리 잠이 든 것처럼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허수경,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처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왜?”냐고 물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인데도 20년 전엔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기를 먹는 삶이 기본이었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주변의 삶이었으므로. 나는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시선을 피하거나 먼 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사실 (고기) 씹는 맛을 몰라. 그냥 종이 씹는 거 같애.”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취향이라고 여겨지면 사람들은 입을 닫는다. 그러나 신념 혹은 가치를 피력하면 반응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래서, 소를 키우기 위해 광범위한 면적에서 옥수수를 재배해야 하고, 사람대신 그걸 먹고 사람에 먹히기 위해 키워지는 소들이 배출하는 메탄가스가 어마어마하며, 실은 그것이 지구온난화의 원인이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고깃집에서 회식이 있으면 조용히 가위와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구웠다. 그러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고기를 먹든 먹지 않든. 나는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썼다. 논쟁의 중심에 서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다른 메뉴를 골라보라 하면 나는 손사래 치며 됐다고 했다. 신경 안 쓰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작게 속삭이기도 했다.


음식물 쓰레기가 -음식물 쓰레기라는 말에 익숙해지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는데-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귀농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 실려 가서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결국엔 나를 덮치는 상상을 자주 했다. 눈에 보이는 곳에 버려야 겠어, 땅에 버려야 겠어. 거두절미, 말할 수 있다. 음식물 쓰레기가 날 이 곳으로 이끌었다고. 귀농 후 동물을 키웠다. 모두 개였다. 곰순이, 장마, 해리, 뭉치, 그리고 이름을 잊은 한 마리가 더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먹지 않는 동물들의 시체와 내가 집에서 키우고 있는 살아있는 동물들 사이의 유비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풍산개였던 곰순이는 아이를 낳기 전에 키웠다. 살을 부비며 지냈다. 이름을 잊은 한 마리는 거의 기억에 없다. 그 개가 마당에서 놀고 있을 때 뱃속에 둘째가 자라고 있었다. 장마는 서툰 보호자 때문에 집밖을 자주 떠돌았다. 해리는, 해리는, 그 시절 내게 있어서 가장 약한 존재였고, 나는 그 약한 존재를 자주 찾았다. 당시 나는 두 아이의 엄마였고, 한 가정의 며느리였고, 한 남자의 아내였지만 동시에 괴물이었다.


그(장 아메리)는 고문을 세상과의 신뢰, 타인이 나를 죽이려고 들 때 누군가 바깥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완전히 상실하는 경험이라고 설명하며 “고문, 그것은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 즉 강간이다.”라고 쓴다.

-권김현영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휴머니스트, 46쪽


약한 것으로 존재하는 해리는, 해리라는 이름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가치도 모두 절멸한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도살장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소리가 소거되고 흐르는 피가 씻긴 채 동물의 시체가 고기로 둔갑하여 시내로 진입하고 있음을, 푸주한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약한 것으로 치환된 해리에 대한 나의 으름장과 목줄을 바투 잡는 행동과 다를 바 없음을, 해리가 벽돌에 머리를 누이고 차갑고 단단한 몸이 되었을 때 그 때 알았다. 육식하는 이들에게 채식주의자라는 나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한 일은 배려가 아니라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극단 연출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도 그것이 무슨 일인지 구성할 언어가 없던 스물 넷의 나와,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나에게 고기를 왜 먹지 않느냐고 묻는 그들에게 대항할 언어가 없던 스물아홉의 나는 여전히 같은 지점을 맴돌았다는 사실도 그 때 알았다.


“책임지겠습니다.”


마을학교에서 장애청년의 학교 출입을 두고 양육자와 교사가 모여 의견을 나눴다. 다양한 지점들이 교차하는 문제여서 세밀하면서도 담대한 가치와 사고가 필요했다. 학교장은 ‘책임지겠다’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참으로 든든하면서도 아득한 말이로고.’ 책임. 법학적으로는 ‘비난가능성’을 내포한다. 덕분에 ‘책임 없이 형벌 없다’는 심플한 문장이 바로 떠오른다. 책임진다는 건 뭘까.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것. 그것으론 충분치 않다.

또 다른 마을학교가 기숙사에 학생의 반려견을, 그리고 법적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의 출입을 제한했다. 양육자가 이의를 제기했고 교사와 양육자 몇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탱자씨에게 주워들은 해러웨이의 응답-가능/성(response-able/ablity)을 마음에 담는다. 그리고 이 문장 또한 기억하고자 한다.


어느 한 편에 선다는 것은 우리 내부의 일정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갈무리, 47쪽


사라져가는 소리들,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소리들. 나는 그 소리 기꺼이 듣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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