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200미터 쯤 올라가면 지리산 둘레길이다. 늘 가는 방향은 3코스 매동(인월)방향인데 오늘은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숲 속으로 들어가기엔 날이 싸늘해서 해바라기도 할겸 완만한 길을 천천히 걸을 요량이었다. 지리산 3코스 인월-금계 구간, 그 중에서도 매동을 지나 숲속을 한참 거닐다 빠져나와 감상하는 다랑이논이 인월-금계 구간의 백미다. 다랑이논은 내가 5년전까지 10년을 살았던 중황~상황 마을에 걸쳐 있는데 그 길을 걷다보면 두 아이를 낳고 키웠던 상황마을의 옛 집도 보인다. 그런데 산책을 나서자마자 어쩐지 계속 돌아가고 싶었다. 몇년 전부터 이 구간에 으리으리한 새집들이 들어섰고 내가 상황에 살았을 때 이미 중황~상황간 둘레길 쉼터는 포화상태였다. 평생 농사로 먹고 살던 주민들이 민박에 손을 뻗게 되고 쉼터에서 술과 음식을 파는 장사가 과열되어 주민들끼리 의 상하게 된 일도 적잖았다. 십년 쯤 전 '1박2일'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간 후 둘레길은 애초의 순례길이 아니라 앞사람 뒤통수를 보면서 따라가는 인구밀도 최고의 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다랑이논은 다랑이논보다 더 촘촘하게 들어 선 비닐하우스에 잠식되었다. 상황까지 걷다가 옛집을 지나 오른쪽 산등성이에 들어선 집들을 바라보았다. 저 높은 곳까지 나무를 베고 터를 닦아 집을 짓는다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까. 남 얘기가 아니다. 나도 5년 전 상황을 떠나 부모님과 같이 산다는 이유로 숲의 나무를 베어낸 곳에 지어진 집으로 이사를 했다. 다행히 이 마을은 20가구 모두가 푸세식 화장실을 실내에 들였고 오폐수 정화시설을 구비한 마을이었다. 물론 지금은 20가구 중 대부분이 수세식 화장실로 시스템을 바꿨고, 동거인이 집에 들를 때 똥푸는 일을 전담하고 있는 우리집도 이 화장실을 언제까지 고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 이 집을 선택했을 때(그 땐 부모님을 모시고 내려오는 일이 급선무여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지만) 이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오폐수를 특히, 오줌 똥이 섞인 물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위안이었다. 나이가 들면 똥푸는 일은 여의치 않을 것이고, 그러면 (쓰레받이를 이용해 그 때 그 때 치우든지) 더 쉬운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내려가야, 한다. 높은 위치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한 눈에 들이고 사는 호사를 누리면서 아랫동네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는 없다. 내가 쓰고 버린 물은 다른 그 어디도 아닌 아래로 흐른다. 우리집으로 오라며 악다구니를 쓰며 호객행위를 하는 둘레길 인근 어머님들은 그래, 가끔 쓰레기를 태운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만큼 택배를 시키지 않는다. 나는 이미 소비한 플라스틱을 재활용하지만 그들은 고추 묶는 끈도 아까워 반을 갈라 쓴다. 솔직히 한번쯤 더 이사를 하고 싶다. 이제는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는 이 집이 너무 넓다. 관리하기도 청소하기도 벅차다. 아직은 아이들 친구들이 잘 이용해주고 있고, 내 동료들도 가끔씩 찾아와 줘 쓸모가 없지 않지만, 작고 에너지가 덜 드는 작은 규모의 집에 살고 싶다. 그렇다고 내려가서 새집을 짓느라 또 관정을 파고 논을 땅으로 만들어 영원히 썩지 않을 자재로 집을 또 짓는 광경은 끔찍하다. 있는 집을 좀 수리해서 살고 싶은데, 이미 살면서 수리해서 살아 본 경험으론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좋다. 푸세식 화장실도 좋고, 재활용 쓰레기 배출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응답해주는 이웃들도 좋다. 저녁놀이 질 때마다 아이들이 감탄하는 이 집. 그 풍광을 누리는 대신 내가 치러야할 대가에 대해 잊지 않고 싶다.